<조선왕조 뒷 이야기> 111
楚雖三戶亦秦亡(초수삼호역진망)
초나라가 진에 망해 셋집만 남았으나 진도 망하니
未必南公說得當(미필남공설득당)
장의(張儀)의 설득이 옳다고만 할 수없다.
一入武關民望絶(일입무관민망절)
한사람 무관으로 들어가 백성들 희망 저버리고
摩孫何事又悔王(마손하사우회왕)
잔악한 손자를 세워 회왕이라 함은 무슨 일인고.
임진국난 극복에 공을 세운 충의공(忠毅公) 정문부(鄭文孚) 선생은, 흔히 임진란 때 관북일대를 수복한 의병장으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독서를 즐기고 시문에 뛰어난 탁원한 문재(文才)였다.
선생은 특히 중국 춘추고사에 밝았다. 위의 시는 그가 창원부사 시절 춘추시대 진(秦)·제(齊)·초(楚)나라의 흥망 성세를 두고 심심파적(破寂)으로 지은 시문이었는데, 이게 선생의 목숨을 앗은 독침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충의공 정선생은 고려 신종 때의 전법정랑(傳法正郞) 정숙(鄭肅)을 비조(鼻祖)로 삼는 해주정씨, 조선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의 장인으로 대제학까지 올랐던 정역(鄭易)의 7세손. 부사(府使) 정신(鄭愼)의 아들로 명종20년(1565) 서울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선조1 8년 20세 때 생원이 되고 3년 뒤 문과에 급제, 한성부참군으로 벼슬길에 들어섰다. 호를 농포(農圃)라 했던 선생을 두고, 노산 이은상(李殷相)은 이렇게 썼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비롯해서, 그 당시 국가 민족을 구원해 낸 위대한 공로자들을 수많이 헤아릴 수있겠지만 그 가운데서도 농포선생 같이 기이한 공적을 세운 이는 극히 드물다.』
선조31년(1598) 11월 19일, 왜란은 끝이 났다. 충의공은 그간 영흥·온성·안변부사, 길주·공주목사 등을 거쳐 이듬해 호조참의가 되니, 요즘의 기획재정부 국장쯤 벼슬. 이때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그의 문무겸전한 인물상을 천하에 과시하였다.
선생 44세 때 선조가 세상을 뜨고 광해군이 등극했다. 공은 당쟁을 피해 힘센 중앙관직을 모두 사양하고 백성들은 직접 돌보는 지방수령으로 전전했다.
공은 너무 청빈하여 수령직을 마친 날 그 날부터 끼니를 걱정해야 할 만큼 가세가 쪼들렸다. 너무 맑고 바른 삶을 살고자 한 그를 두고, 그의 절친한 친구 좌의정 이정구(李廷龜)는 이렇게 걱정하였다.
『농포는 그 인물과 재능, 기량이 참으로 얻기 어려운 사람인데 다만 한스러운 것은 강직함이 너무 지나친 점이다』
임란 극복 공적으로 광해군의 신임을 받은 공이 전주부윤으로 있을 때, 전주지방 토호로 간사한 장사꾼이 있어 이를 다스렸는데, 중앙 요직의 박정(朴炡)이란 자가 문제의 모리꾼을 봐 달라 청했다. 그러나 공이 뜻을 굽히지 않고 그 간상(奸商)을 처벌해버리니, 박정은 공을 「두고 보자」 며 벼렀다.
인조2년(1624) 정월「이괄(李适)의 난」이 있었다. 인조는 충의공을 부총관에 임명, 이괄 토벌 명을 내렸다.
마침 병환 중이던 공은 불편한 몸을 이끌고 용인까지 내려가 인조를 뵙고 「출전 불가」 한 처지를 아뢰었다. 「이괄 난」 은 쉽게 평정 됐는데, 충의공은 그를 시기하는 무리들로 부터「불충」 으로 꼬집히고 말았다.
충의공의 장자 정대영(鄭大榮)은 선조의 조카 익성군(益盛君)의 사위로 최내길(崔來吉)과 동서였다. 한데 경망한 품행의 최내길은 늘 장인이 무시했고, 정대영은 후하게 대접했다.
이에 최내길이 앙심을 품고 노리다가, 어느날 충의공 집에 들려 벽에 바른 종이에 충의공이 옛날에 읊었던 「중국 고사 시」 를 보고 꼬투리로 삼아 흑심을 품었다. 그는 시를 유심히 읽고, 곧 바로 충의공을 벼르던 박정에게 일러 일을 꾸몄다.
「광해군의 총애를 받은 농포는 인조에게 소극적이다」 는 냄새가 시문에 풍긴다는 것이었다. 이때 사헌부 장령 박정이 전격 충의공을 포박하니, 조정 고관들은 「설마 흑백이 가려지겠지」 하는 소극적 태도만 취할 뿐, 발벗고 나서서 공을 구하려는 자가 없었다.
박정과 최내길의 빈틈 없는 수작에 충의공은 모진 문초를 받다가 허무하게 숨지고 말았다. 이른바 장하지사(杖下之死). 인조2년(1624)의 일이라 공의 생애 60년은 이렇게 끝이 났다.
국난에서 나라를 구한 민족의 영걸, 기리 사표가 될 목민관, 비길데 없는 청백리요 책읽기를 즐긴 문학가 충의공은 이렇게 최후를 마쳤다.
아들 대영, 대융(大隆)은 공의 유언을 쫓아 벼슬에 뜻을 접고 따뜻한 남쪽 땅 진주에 내려와 터를 잡았고, 공이 숨진 90년 뒤에야 허물이 벗겨지고 「충의공」 으로 시호가 내려졌다.
<정 연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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