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 118
근래 지방화시대에 들어 하동 군민들이 크게 관심을 갖고 자랑하는 역사적 인물 가운데 한분 정기룡 장군은, 선조 임금이 지어준 「기룡(起龍)」 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활약한 임진왜란 때 육전의 명장이었다. 66전 66승이라는 전승 기록을 두고 향토 출신 문호(文豪) 이병주는 『정기룡 장군은 나폴레옹보다 전투를 잘했던 돌격장이었다』 라고 말했고, 중국에서는 그를 「해동명장전」 에 이름을 올렸다.
그런데 참으로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어. 이는 옛 선인들의 일처리가 당파나 인맥을 배경 삼아 너무 편파 편향적이고 주관적 배타 심리가 작용한 까닭이 아니었나 싶다.
선조37년(1604) 4월, 조정은 왜란 극복에 공을 세운 문무제신을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效忠仗義迪毅協力宣撫功臣)으로 이름 지은 공신책록을 단행했다.
모두 18원(員)을 등급별로 나누었는데, 1등에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이순신(李舜臣), 도원수를 맡아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어 병조판서에 오른 권율(權慄), 그는 영의정 권철(權轍)의 아들이었다. 이순신 장군 실각과 함께 통제사였다가 패전 끝에 전사한 원균(元均) 등 3인, 2등에는 문신으로 공을 세운 신점(申點), 진주 대첩을 이끈 김시민(金時敏),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무과에 올라 공조판서에 기용됐던 권응수(權應銖), 문과급제자로 연안성 전투를 승리로 이끈 이정암(李廷암), 원균과 함께 전사한 이억기(李億祺) 등 5인, 3등에는 남원전투에서 전사한 정기원(鄭期遠), 문관으로 공을 세워 호조판서에 오른 권협(權협), 영의정 이항복(李恒福)의 매부(妹夫)로 참판에 오른 유사원(柳思瑗), 제주출신의 무신으로 병사(兵使)에 오른 고언백(高彦伯), 병사 이광악(李光岳), 포로가 됐다가 정기룡 장군의 구출로 살아난 목사 조경(趙儆), 별다른 공적 기록이 없는 권준(權俊), 수군으로 통제사를 역임한 이순신(李純信), 현령을 지낸 기효근(奇孝謹), 옥포해전 선봉장 이운룡(李雲龍) 등 10인, 모두 합해 18인 선무공신이 탄생되었으나, 눈 딱고 봐도 정기룡 장군은 없다.
뿐만 아니라 역사상의 명장들을 기록한 <명장고(名將考)>라는 기록물 가운데 조선시대를 통털어 뽑은 명장에는, 세종때 야인정벌에 공이 많았던 좌의정 최윤덕(崔潤德), 조선 태조가 원수(元帥)로 삼았던 박만(朴蔓), 「이시애 난」 을 평정한 왕족 영의정 이준(李浚), 야인 정벌과 북방 오랑캐 퇴치에 공을 세운 좌의정 허종(許琮),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웠다는 황형(黃衡), 임진왜란 때 배수진을 치고 순절한 신립(申砬), 왜란 때 적정(敵情)을 잘 헤아렸다는 변협(邊協), 신립과 함께 전사한 김여물(金汝물), 충무공 이순신(李舜臣), 도원수 권율(權慄), 후금 정벌에 힘썼다가 처형 당한 김경서(金景瑞), 병자호란 때 공을 세운 유림(柳琳), 소년시절 임진왜란을 맞아 공을 세우고 「이괄의 난」 진압에 활약했던 정충신(鄭忠信), 후금정벌에 힘쓴 심총(沈摠), 정묘·병자호란때의 장수 임경업(林慶業), 효종 때의 훈련대장 이완(李浣), 정묘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활약한 전 현감 정봉수(鄭鳳壽), 효종 때 청나라를 도와 러시아군 정벌에 출전하고 현종때 삼도 수군통제사를 거쳐 숙종때 포도대장을 맡았던 신류(申瀏) 등 19인이라, 한번도 들어 보지 못한 생소한 이름들도 많은데, 정기룡 장군 이름은 빠졌으니,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분명히 정기룡은 중국에서까지 알려진 명장이라했는데 왜 챙겨주지 않았을까?
위 글은 1965년 역사학자 김순동(金舜東)이 편저한 <한국고사대전(韓國故事大典)>에 실려있는 내용을 인용하여 정리한 것인데, 같은 책에 실려 있는 정기룡 장군에 대한 기록은 이랬다. 『정기룡 : 고성(固城)에서 사는데, 가난이 심하여 소금장수를 하기도했다. 무과에 급제하더니, 진주에 있으면서 의병을 일으켜 만부(萬夫)도 당하지 못 할 용맹으로 대공을 세워 관직은 통제사에 그쳤음』
보잘 것 없는 가문 출신으로 용맹을 떨쳐 공을 세워 벼슬이 통제사에 이르렀다는 내용일 뿐이었다. 무과에 급제하고도 직위를 얻지 못해 의병으로 전투에 뛰어 들어 뒤에 통제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몇해 전 하동군에서 「정기룡 장군 현창사업」을 기획, 대학에 용역을 주어 정기룡 재조명 사업을 펼쳤는데, 용역을 맡은 학자들이 군민 다수를 모아 놓고 결과를 발표했다.
그런데 한결 같이 정기룡 장군이 전투 잘했다는 말만 무성했고, 어떤 까닭으로 평가 기록에 이름이 올려지지 않았는지에 대한 아무런 설명이 없어 「용역비만 날려구나」 싶었다.
교수들의 연구가 없어도 정기룡 장군이 임진왜란 때 전투를 잘 했다는 사실은 웬만한 군민이면 이제 다 아는 일인데 괜한 수고만 했다는 뜻이다.
한참 뒤에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선무공신 1등 5위에 추록 됐다고 하기는 하나 그걸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정기룡에 대한 광해군의 총애가 걸림돌이 된게 아닌가 싶다.
정 연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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