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 119 아우를 살린 형
선조21년(1588) 무렵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의 일로 전해오는 이야기다. 그때 국방에대한 책임은 병조판서 유성룡(柳成龍)이 맡고있었다.
비록 국정 최고의 위치에는 못 미치는 판서 자리에 머물렀으나, 나라의 중요 정책이 유성룡의 머리에서 나오는 지경에 이르러 이웃 일본·중국에서 까지 유성룡을 조선의 인재로 여기는 바가 되었다.
유성룡의 본관은 풍산,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 유중영(柳仲영), 오늘날의 경상북도 안동이 고향이었다.
그는 아버지 뜻에 따라 21세 때 안동 도산(陶山)에서 석학 이황(李滉)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때 퇴계 이황은 유성룡의 재질을 꿰뚫어 보고 말했다. “차인천소생야(此人天所生也)라!” 풀이하면 『이 사람은 하늘이 낸 사람이다!』 였다.
유성룡은 이황이 짚었던 말대로 극에 달한 당파 싸움과 권력 암투 중심에서도 인품 하나로 선조 임금의 신임을 받아 승승장구했다.
47세때 예조판서와 동지춘추관사, 홍문관제학을 겸해 백성들 교화를 도모한 『향약(鄕約)』을 반포했고, 왕명으로 송나라 충신 문천상(文天祥)의 문집 <문산집(文山集)> 서문을 지어 올렸는가 하면, 충신 정몽주(鄭夢周) 문집을 교정, 그 발문(跋文)을 써 올려,『충(忠)』을 기려 『성군(聖君)』 을 꿈꾼 선조의 마음을 끌었다. 이웃 일본의 낌새가 수상하자 왕에게 「일본에 사신을 보내 탐색해야한다」고 몰래 건의했던 신하도 유성룡이었고, 황윤길(黃允吉)·김성일(金誠一) 두 사신의 엇갈린 보고로 판단이 어려울 때, 홀로 일본의 야심을 짐작, 이순신(李舜臣) 같은 명장을 파격적으로 발탁했던 인물도 곧 유성룡이었다.
유성룡에게는 세살 위의 형 유운룡(柳雲龍)이있었다. 그도 이황 문하에서 배워 경사(經史)에 밝아 사문(斯文)의 촉망을 받기는 했으나 벼슬 에 뜻이 없어 과거를 보지 않았다.
왕이 음서(蔭敍)로 발탁, 현감 등 낮은 벼슬을하는데 세상을 보는 눈은 높아, 훨씬 높은 벼슬의 아우 유성룡보다 경륜은 월등했다. 어느날 그는 승승장구하는 아우 유성룡을 은근히 찾아 이렇게 타일렀다.
“내가 어리석은 말인지는 모르나, 무엇이든 다 할줄 안다고 거기에 만족해서는 안되며, 권세와 지위를 한몸에 지녔다고해서 교만하거나 방자해서도 안되네! 아우는 지위가 높아지고 명망이 두터워져 갈수록 아우의 생명을 노리는 악마떼들이 등뒤에 따라 다닌다는 것도 알아야 할 것일세!” 하더니, 끝에 이런 부탁을 덧붙였다.
“오늘부터 사흘째 되는날 저녁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서 왔다는 대사(大師)가 찾아와「사랑에 하룻밤 자고 가겠다」 할것인데 아우는 무슨 핑계를 대서든지 내집으로 먼저 인도해 주게!”
유성룡은 「그 대사가 누군데요?」 하고 으아해하며 되물었다.
“그건 차츰 알것이고 반드시 내 말에 따라 주어야하네!”
평소에 형을 이인(異人)이요 철인(哲人)으로 여겨 왔던 유성룡은 3일을 아무런 내색 없이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금강산에서 왔다는 승려가 유성룡 집을 찾았다. 유성룡은 「참으로 신기한 일도 있구나」 싶어 승려에게 자기를 찾아온 사연을 물었다.
“네! 올 가을 철을 맞아 팔도명산대찰을 찾아 유람행각을 하옵는데, 삼남으로 내려 가는 중 오늘 서울에서 유상공의 존엄하신 명성을 듣사와 하룻저녁 대감을 모시옵고 높으신 교훈을 듣고자하나이다”
“음, 그렇다면 나와 함께 같이 잠도 자겠다는 말인가?”
“네, 외람되옵고 황송하옵니다만…!”
유성룡은 형의 부탁대로 오늘은 다른 일정이 있어 어려우니, 다음날 밤에 보자며 청지기를 시켜 그 승려를 유운룡 집으로 보냈다. 승려가 가짜임을 미리 간파한 유운룡은, 「허심탄회한 대화에는 술이있어야 한다」 며 술자리를 폈다. 처음에 주저하는 체하다가 못이긴듯 술잔을 받기 시작한 가짜 승려는, 그만 주는 대로 잔을 드리키더니 끝내 곯아 뻗어 버렸다. 유운룡은 부리나케 가짜 승려의 윗도리를 헤쳐 그가 품고있던 날카로운 일본도(日本刀)를 찾아냈다. 유운룡은 무시무시한 비수를 뽑아들고 승려 가슴을 깔고 앉아 비수로 목을 겨누며 소리쳤다.
“이놈아! 너는 풍신수길 밀명을 받고 유상공을 암살하려 왔지? 아무것도 아닌 나도 풍신수길의 일거일동을 알고있는데, 유명하신 유상공이 어찌 모르겠는가? 목숨만은 살려 줄테니 이 밤으로 네나라로 돌아가 풍신수길에게 이 사실을 고하라!”하고 호통 쳐 쫓아 버렸다.
유운룡은 뒤에 풍기군수를 거쳐 원주목사가 됐다. 그는 예리한 혜안으로 명상 유성룡의 목숨을 구한 천하의 이인(異人)으로 전한다.
정 연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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