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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뒷 이야기

<조선왕조 뒷 이야기> 121

by 까망잉크 2019. 1. 30.

 

 

<조선왕조 뒷 이야기> 121

(주)하동신문

『순신은 어렸을때 재질이 영특하고 활달하여 아무도 속박(束縛) 할 수가 없었다. 여러 아이들과 놀이를 할적에 나무를 깎아 활과 화살을 만들어 놀면서 마음에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의 눈을 쏘려고하니, 어른들도 그를 두려워하여 감히 그 집 앞을 지나기를 꺼렸다. 장성하여서는 활쏘기를 잘해 무과(武科)로 출세하였으니, 그의 조상들은 대대로 유학(儒學)을 업으로 하였는데, 순신 때에 와서 처음으로 무과로 등과…(중략)
병조판서 김귀영(金貴榮)이 서녀(庶女)가 있어 순신에게 첩으로 주려했더니, 순신은「내가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갔는데 어찌 권세 있는 집안에 의탁하여 앞길을 도모하겠는가」하며 거절했다.
병조정랑 서익(徐益)이 훈련원에 있는 친지를 특별히 천거하도록 훈련원 원중장무관(院中掌務官)으로 원내 인사 실무자였던 이순신에게 압력을 넣자 이순신은「옳지 않다」며 잘라 거부했다. 비위가 틀어진 서익은 이순신을 불러 뜰아래 세워 놓고 힐책하였다. 그러나 순신은 말과 기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조용히 대꾸하며 버텼다. 옆에서 지켜보던 관원들이 놀라 서로 돌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이분(이순신)이 감히 본조의 정랑(正郞)에게 항거했다가 앞으로 어찌 될것인지를 생각지 않는 것인가!.」 날이 저물어서야 서익이 기가 꺾여 순신을 돌려 보내며 계면쩍어했다. 이 일로 사람들은 이순신의 인품을 알게 되었다.
왜란 중에 그가 옥에 갇혀 장차 일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는데, 옥리(獄吏)가 그의 조카 이분(李芬)에게 은밀히 「뇌물을 쓰면 나갈 수 있겠다」 했다. 순신은 이 말을 듣고 화를 내 「죽으면 죽었지 어찌 도리를 어겨 살기를 바라겠는가!」 했으니, 그가 지조를 지킴이 이와 같았다.
순신의 사람된 품은 말과 웃음이 적고 용모가 단아하여 몸을 닦고 언행을 삼가는 모습이 선비와 같았으나, 그의 속에는 담기(膽氣)가 있어 자기 몸을 잊고 국난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으니, 이것은 평소에 수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형은 희신(羲臣)과 요신(堯臣)인데 모두 순신보다 먼저 죽었으므로, 순신은 그들의 자녀를 자기 자녀와 같이 돌보아 주고, 시집보내고 장가보내는 데도 반드시 형의 자녀를 먼저 보내고 자기 자녀는 뒤에 보냈다. 재간(才幹)은 있어도 명운(命運)이 없어서 가졌던 재간 백가지 중에 한가지도 시행하지 못하고 죽었으니, 아아!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이하 생략).』 이순신과 어릴적 친구였던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그의 <징비록(懲毖錄)>에 기록해 둔 이순신장군에 대한 인물평이다.
이순신은 인종1년(1545) 3월 8일, 양력으로 헤아려 4월 28일, 오늘날의 서울 중구 인현동에서 태어나, 어머니 변(卞)씨의 친정 곳인 충청도 아산 백암리(白岩里), 현재의 현충사가 자리한 방화산(芳華山) 기슭으로 옮겨 터를 잡아 살다 보니 그곳이 고향이 돼버렸다. 처음에 유학을 공부하다가 소질이던「활쏘기」에 마음이 쏠려 무(武)의 길을 걸었는데, 28세 늦은 나이에 서울로 올라와 무과를 치르다가 달리는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어 불합격했다. 4년 뒤 32세 때 다시 응시, 이번에는 4등으로 급제했다. 그의 첫 벼슬은 함경도 백두산 근처의 삼수(三水) 동구비보(童仇非堡)의 권관(權管), 요즘으로 치면 최전방 소대장 계급 정도였다. 변방 근무 2년을 마친 35세 때 받은 직위가 종8품 훈련원 봉사였다.
영의정을 지낸 유전(柳전)이 병조판서 시절, 훈련원봉사 이순신의 화살통이 명품이라는 소문을 듣고 달라했다. 그러나 이순신은「드리는 것은 쉽지마는 별거 아닌 것 가지고 좋지 못한 소문이라도 나면 제가 미안해서 어쩝니까!?」 하고 거절했다. 국방부장관이 산하 위관급 장교에게 하찮은 물건 하나를 욕심냈다가 속만 앗긴 셈이었다. 높은 자에게 못 바쳐서 안달이던 세태에 참으로 하늘이 놀랄 일이었다.
조정 인사권을 거머쥔 이조판서 이이(李珥)가 도승지 유성룡을 통해 이순신을 한번 만나 보고자했다. 유성룡은 그 무렵 요즘의 대통령비서실장격인 극히 높은 자리에 있던 터라, 친구인 이순신을 돕고자 마음은 두고도, 이순신의 성품 때문에 입밖에 내질 못했다가, 이이의 말을 듣고 「잘됐다」싶어 이순신에게 「율곡(이이)을 한번 찾아 보라」 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와 나는 종친이니 그가 이조판서로 있는 동안에는 만나지 못한다」 며 역시 거절하였다.   
성품이 올 곧기로 이름난 이순신은 혼탁한 관계(官界)에서 언제나 밀려 다녔다. 뒤에 발포만호(鉢浦萬戶) 때는 그전의 국방부인사국장격이던 병조정랑 서익의 보복을 받아 파면을 당해 버린 일도 있다.
근세 일본의 작가 시바(司馬遼太郞)는 이순신을 두고 「충성심과 용기로 보나 이런 인물이 세상에 실재(實在)했다는 자체가 기적이다」라고 적었다.
                                                    
정 연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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