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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뒷 이야기

조선왕조 뒷 이야기>122 조헌(趙憲)과 그의 아들

by 까망잉크 2019. 2. 2.

조선왕조 뒷 이야기>122 조헌(趙憲)과 그의 아들
(주)하동신문
나라를 위한 충심에서 바른 뜻을 담아 자주 상소를 올렸으나 임금이 용납하질 않으니, 신하 노릇에 한계를 느낀 나머지 관직을 버리고 유학(儒學)에 몰두하던 조헌은, 임진왜란이 터지자 분연히 문도(門徒)들을 의병으로 모아 왜적과 맞섰다. 
그는 마침내 금산(錦山)전투에서 700명 의병들과 함께 장렬히 순국해버린 강직한 충신이며 학자요 의병장으로 이름을 남겼다. 선조 말엽의 문필가 권필(權필)이 언젠가  금산에서 조헌의 흔적을 찾아 이런 시를 지었다.
幾折朱雲檻(기절주운함) 
  몇 번이나 주운처럼 대궐 난관을 꺽었던고
長吟楚澤醒(장음초택성) 
  오랫동안 초택에 깨어있음을 읊었도다
從知大君子(종지대군자) 
  슬기 따르는 대 군자는 
不處小朝廷(불처소조정) 
  조그마한 작은 조정에는 서지 않았고
直氣軒天地(직기헌천지) 
  곧은 기개는 천지에 드높았다
孤忠炳日星(고충병일성) 
  외로운 충성은 해와 별처럼 빛나고
崔魂錦山色(최혼금산색) 
  우뚝 솟은 금산의 산빛은
萬古只마靑(만고지마청) 
  만고에 푸르기만 하여라.
첫 구절의 「주운(朱雲)」은 중국 한나라 신하 주운이 옳은 말로 왕에게 간(諫)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 끌려 나갈 때 나가지 않으려고 궁궐 난관을 붙들고 늘어져 난관이 무너져버린 고사(古事)에서 따온 말이었고, 두 번째 구절「초택(楚澤)」 은 초나라 신하 굴원(屈原)이 바른말을 하다가 쫓겨나 혼자 못가를 거닐며 탄식했더니, 한 어부가 쫓겨난 이유를 물었다. 이에 굴원은 “온 세상이 모두 취했는데 나만 홀로 맨 정신이라 쫓겨났노라!”고 했던 고사를 인용한 말이었다. 
조헌의 본관은 배천(白川) 호가 중봉(重峯), 중종39년(1544) 경기도 김포에서 조응지(趙應祉)의 아들로 태어났다. 
열두살 때 공부를 시작했는데, 부모님 거처에 불을 지펴드리면서 그 불빛에 책을 읽었고, 밭에 김을 맬 때는 나뭇가지로 얽어 만든 책걸이에 책을 걸어 옮겨 가며 글을 익힐 만큼 눈에 책을 떼지 않으려했다.
그는 23세 된 성균관 학생이었을 때 그 무렵 문정왕후의 비호를 받는 승려 보우(普雨)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학생들과 함께 대궐 앞에 엎디어 왕의 비답을 기다리다가 모두 헤어졌으나, 조헌은 혼자 밤을 새우며 버텨 그의 강직한 기질을 들어냈다. 24세 때 문과에 올라 첫 벼슬로 교서관(校書館) 부정자로 벼슬을 시작했으나, 직책이 불교행사를 주관하는 자리라 그는 “신은 입으로 성현의 글만 읽어 부처에게 공양하는 일은 못합니다!” 하는 상소를 올려 그만 파직 당하고 말았다. 이후 그는 이이(李珥), 성혼(成渾)을 찾아 배워 유학에 더욱 매진했다. 
선조7년(1574) 조헌은 찬정관(贊正官)에 발탁되어 명나라에 다녀온 이후 호조좌랑, 현감 등을 역임하다가, 「정여립(鄭汝立)의 반역」 을 예언한 만인소(萬人疏)를 올렸는데, 반응이 없자 관직을 버리고 옥천(沃川)에 은거해버렸다.
조헌은 왜군의 침략을 예견한 나머지 일본과의 관계를 두고 귀찮을 정도로 임금에게 상소를 자주 올렸다. 특히 도끼를 들고 대궐 앞에 엎드려 올렸던 이른바 「지부(持斧)상소」 는, 한마디로 자신의 행위가 그릇됐다면 「도끼로 목을 쳐 달라」 는 목숨을 건 강경한 행위였다.
선조25년(1592) 4월 마침내 왜란이 터지자 조헌은 보은(報恩)에서 문도들을 이끌고 의병을 일으켜, 그해 8월 1일 승병장 영규(靈圭)와 함께 적의 수중에 떨어진 청주성을 회복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8월 27일 조헌은 전라감사 권율(權慄)과 금산(錦山)에서 적을 협공하기로 약속했는데, 권율의 군사가 도착하기 전에 적의 거센 공격을 받은 조헌의 700명 의병은 중과부적으로 그만 패하고 말았다. 
화살이 떨어져 맞붙어 백병전을 벌인 의병들은 한사람도 피하는 자가 없었다. 그때 조헌의 아들 조완기(趙完基)는 아버지 대신 죽고자 일부러 대장인체 화려한 차림으로 꾸며 싸우다가 죽으니, 적이 그를 주장(主將)으로 여겨 그의 시체를 칼로 찍고 전과물로 거두어갔다. 나이 22세, 죽음을 앞두고 아버지를 살펴드린 장한 죽음이었다. 마침내 조헌 마져 순절하니 향년 49, 이튿날 조헌의 아우 조범(趙範)이 형의 시신을 찾아 장사 지냈는데, 조완기 주검은 찾을 길이 없었다. 
조완기의 기발한 효심이 아버지 시신을 지켜드린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젊은 조완기의 효열을 기려 고향에 정문을 세워주었다.
문열공(文烈公)으로 시호가 내려진 조헌은 영조10년(1734) 영의정에 추증되고, 고종20년(1883) 문묘에 배향되어 선비들의 추앙을 받고있다. 1971년 정부는 금산의 조헌부자의  순절지 칠백의총(七百義塚)을 성역화하여 그들의 의로운 죽음을 기리고있다.             
정 연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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