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명환 外 시간여행·문학 기행기

[김명환의 시간여행] [2] 남녀노소 뛰어든 '국민취미' 우표수집…

by 까망잉크 2022. 9. 16.

[김명환의 시간여행] [2] 남녀노소 뛰어든 '국민취미' 우표수집… 신종발매 땐 한 우체국에 만여명 몰려

김명환 사료연구실장
입력 2016.01.13 03:00
 
 

어린이날이었던 1979년 5월 5일. 서울을 비롯한 부산, 인천, 대구 등 대도시의 모든 우체국이 새벽 6시부터 수백~수천 명의 어린이들에게 '포위'됐다. 이날 발매를 시작한 '세계 아동의 해 기념우표'를 사려고 달려온 것. 서울중앙우체국 건물에는 1만5000명이 몰려왔다. 어떤 우체국 직원들은 인파를 정리하느라 막대기를 들고 어린이들에게 군대식 '앉아번호'를 시켰다. 660만장의 새 우표가 그날로 깨끗하게 매진됐다.(조선일보 1979년 5월 10일 자) 우표수집 붐 절정기의 열기는 그렇게 뜨거웠다. '기념우표 구매 전쟁'은 1979년 한 해에만 10여 차례 반복됐다.

새 우표를 수집하려는 일부 어린이들이 아파트 우편함에 꽂힌 편지까지 가져간다고 보도한 사회면 톱 기사(왼쪽·조선일보 1976년 11월 20일자). 오른쪽은 1884년 발행된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인 문위우표.

오늘날도 우표 수집가들이 있지만, 30~40여 년 전 전성기 때의 붐은 상상 이상이었다. 정치인, 장관으로부터 초등학생, 주부, 노인까지 남녀노소가 모두 뛰어든 '국민취미'였다. 외무부장관을 지낸 고 정일형 박사는 10만여 장, 사과궤짝으로 셋을 모았다. 그의 어머니와 아내(고 이태영 박사)도 우표를 모았다. 이 취미는 일단 손쉽게 할 수 있었다. 사용한 우표를 모으는 건 돈도 안 들었다. 뭔가를 차곡차곡 늘려가는 뿌듯함, 문화를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게다가 우표는 돈이 됐다. 1970년대 기념우표들은 발매 후 몇 달만 지나면 액면가의 서너 배에 거래됐다. 우표로 돈 벌어 등록금 낸 대학생도 있었다. 1978년 부동산 쪽 경기가 시들해지자 투기 자금들이 한때 우표로 몰렸다. 체신부도 돈벌이에 맛들였는지 기념우표를 더 많이, 더 자주 발매했다. 나중엔 한 가지를 1000만장 가까이 찍었다. 수집가들은 '우표의 희소가치를 떨어뜨리는 처사'라며 불만을 터뜨렸다. 일부 학생들은 우표 긁어모으려고 수단 방법을 안 가렸다. 1969년엔 고교생 셋이 우표를 떼내려고 우체통 속 편지 94통을 빼내다 붙잡혔다. 아파트 우편함의 편지가 없어지는 원인 중 하나로 1976년 조선일보는 '우표 모으려는 어린이들'을 지목했다. 희귀 우표에 목매던 어느 우표상은 북한 우표를 입수했다가 붙잡혔다. 법원은 '호전적 문구와 북괴 고위층 초상화가 있는 북괴 우표 매입 자체가 반국가단체나 그 구성원을 찬양·고무하는 행위'라며 '반공법 위반'이라고 판시했다 (조선일보 1977년 11월 29일 자). 1986년 8월 화재로 발매 취소된 '독립기념관 개관 기념우표' 구하기 경쟁엔 국회의원들까지 가세했다. 10여 명의 의원들은 체신부에 '이 우표 안 내놓으면 정기국회 때 각오하라'는 협박까지 했다.

'고바우영감'의 시사만화가 김성환 화백은 요즘도 우표를 들여다보는 명 컬렉터. 대표적 수집 장르는 실수로 잘못 인쇄된 '에러(error) 우표'다. 언젠가 '에로 우표'에 몰두한다고 잘못 보도됐을 때도 그는 "덕분에 전국에 색골로 알려졌다"고 껄껄 웃었다. 얼마 전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정봉이의 우표앨범이 등장하자 여러 시청자가 '잠시 그 옛날로 돌아갔다'고 반가워했다. 우표 수집 붐은 사라진 게 아니라 책장 안의 옛 우표책처럼 잠시 쉬고 있는 듯하다.

조선일보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