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환의 시간여행] (4) '스트리킹'(나체 질주) 상륙에 치안 당국 초비상… 범인 잡으려 임시 반상회·호구 조사발행일 : 2016.01.27 / 여론/독자 A29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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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이신문보기1974년 3월 13일 오전 8시 15분쯤 서울 안암동 고려대 정문 앞에서 깜짝 놀랄 만한 풍경이 펼쳐졌다. 20대 청년 한 명이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차도 한복판 500여m를 달리다 골목으로 사라졌다. 영하 7도의 추위를 무릅쓴 알몸 질주는 출근길 행인 50여명을 경악에 빠뜨렸다. 미국 대학가를 휩쓴 '스트리킹(streaking)'의 국내 첫 상륙이었다(조선일보 1974년 3월 14일자). 경찰관이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엄중 단속하던 시절 백주 대로 나체 질주의 충격은 엄청났다. 요즘이라면 웃음거리에 그쳤을지 모르지만 40년 전 우리 사회는 '천인 공노할 만행'처럼 비난했다. 어느 신문은 1면 칼럼을 통해 '어느 집 아들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집 가문도 볼장을 다 봤다'며 '이 따위 얼간망둥이는 전 수사력을 풀어서라도 잡아다가 혼을 내줘야 하겠다'고 썼다. 조선일보는 1개 면 대부분을 할애해 스트리킹 상륙을 긴급 진단하는 좌담을 실었다. 전문가들은 '정신 이상자의 창피한 모방'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스트리킹은 한 번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3월 13일부터 15일까지 3일간 전국에서 홀랑 벗고 달린 사람은 8명. 이 중 주한 미군 병사가 4명이었다. 충무시의 20대 청년은 큰길을 실컷 벗고 달린 끝에 여고 운동장 한복판으로 알몸 그대로 뛰어들어 아수라장을 만들었다. 경찰은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봤는지 대응 수위를 높였다. 치안국은 경범죄가 아니라 형법상의 공연음란죄를 적용해 엄벌한다고 경고했다. 놓친 '범인' 두 사람을 잡으려고 서울 시내 파출소 2 곳에 '나체 질주 사건 수사본부'가 설치됐다. 경찰은 수사관 100여명을 투입해 500여개 업소와 100여곳의 하숙집을 뒤졌고 280여 명의 하숙생을 조사했다. 사건 발생 지역에선 '임시 반상회'와 '특별 호구 조사'까지 실시했다(경향신문 1974년 3월 20일자). 무장공비 검거 작전 버금가는 호들갑이었다. 그러나 달아난 스트리커들을 붙잡았다는 보도는 보이지 않는다.
미국의 스트리킹은 부조리한 기존 질서에 대한 반항이란 측면이 강했다. 한국 청년들은 왜 벗고 뛰었을까. 당시 작가 최인호는 "희한한 장난…유쾌한 마음으로 보게 된다"고 했지만, 유쾌하게만 볼 일은 아니었던 듯하다. 유신 시절이던 1974년 봄은 박정희 대통령 철권통치의 절정기였다. 그해 1월 8일 긴급조치 1, 2호가 선포되며 긴급조치 시대의 막이 올랐다. 1973년 10월 서울대의 유신 반대 데모 이후 대학가에는 긴장감이 높아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나체 질주가 돌출한 것이다. 엄혹한 시절을 살던 젊은이들이 갑갑한 마음을 그렇게라도 표현하려 했던 것은 아닌가 여겨진다. 민주화 이후에도 나체 질주 사건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터졌다. 하지만 아무도 경악하지 않았고 '엄중 규탄'하지도 않았다. 20대 영화감독 모씨가 2008년과 2013년 국군의 날 서울 거리에서 벌인 '전쟁 반대' 알몸 시위를 놓고는 '소영웅주의 아니냐'는 비판은 있었지만 알몸 노출 자체에 대한 비판을 드러낸 언론은 별로 없었다. 조선일보는 그의 알몸 시위 사실을 보도하지 않았다.
스트리킹은 한 번으로 끝난 게 아니었다. 3월 13일부터 15일까지 3일간 전국에서 홀랑 벗고 달린 사람은 8명. 이 중 주한 미군 병사가 4명이었다. 충무시의 20대 청년은 큰길을 실컷 벗고 달린 끝에 여고 운동장 한복판으로 알몸 그대로 뛰어들어 아수라장을 만들었다. 경찰은 사태가 심상치 않다고 봤는지 대응 수위를 높였다. 치안국은 경범죄가 아니라 형법상의 공연음란죄를 적용해 엄벌한다고 경고했다. 놓친 '범인' 두 사람을 잡으려고 서울 시내 파출소 2 곳에 '나체 질주 사건 수사본부'가 설치됐다. 경찰은 수사관 100여명을 투입해 500여개 업소와 100여곳의 하숙집을 뒤졌고 280여 명의 하숙생을 조사했다. 사건 발생 지역에선 '임시 반상회'와 '특별 호구 조사'까지 실시했다(경향신문 1974년 3월 20일자). 무장공비 검거 작전 버금가는 호들갑이었다. 그러나 달아난 스트리커들을 붙잡았다는 보도는 보이지 않는다.
미국의 스트리킹은 부조리한 기존 질서에 대한 반항이란 측면이 강했다. 한국 청년들은 왜 벗고 뛰었을까. 당시 작가 최인호는 "희한한 장난…유쾌한 마음으로 보게 된다"고 했지만, 유쾌하게만 볼 일은 아니었던 듯하다. 유신 시절이던 1974년 봄은 박정희 대통령 철권통치의 절정기였다. 그해 1월 8일 긴급조치 1, 2호가 선포되며 긴급조치 시대의 막이 올랐다. 1973년 10월 서울대의 유신 반대 데모 이후 대학가에는 긴장감이 높아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나체 질주가 돌출한 것이다. 엄혹한 시절을 살던 젊은이들이 갑갑한 마음을 그렇게라도 표현하려 했던 것은 아닌가 여겨진다. 민주화 이후에도 나체 질주 사건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터졌다. 하지만 아무도 경악하지 않았고 '엄중 규탄'하지도 않았다. 20대 영화감독 모씨가 2008년과 2013년 국군의 날 서울 거리에서 벌인 '전쟁 반대' 알몸 시위를 놓고는 '소영웅주의 아니냐'는 비판은 있었지만 알몸 노출 자체에 대한 비판을 드러낸 언론은 별로 없었다. 조선일보는 그의 알몸 시위 사실을 보도하지 않았다.
김명환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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