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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역사) 이야기

왕의 몸은 역사에게 솔직하다 7

by 까망잉크 2022. 10. 13.

 

Trace 11. 왕의 몸은 역사에게 솔직하다 7

원혼들의 공포에 갇힌, 세조(제 7대왕 1417~1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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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을 유배보내고 조카와 김종서까지 무력으로 희생시킨 매정한 권력자이지만, 조선에서 왕권이 가장 튼튼했던 시기로 후세에 세조의 치적 또한 높이살 만합니다. 

당시에는 명분없는 반란으로 해석된 계유정난(癸酉靖難)으로 인하여 조선의 사회적불안은 높아졌고, 민심은 흉흉했습니다.

따라서, 직접 조정을 장악하기 위해 국무총리역할을 하는 의정부가 할 일을 없애고 ‘육조직계제’를 환원하면서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였습니다. 여러 북방정책을 폈을 뿐 아니라 호패법을 강화하고 재상들이 왕을 잘 보좌할 수 있는 대리서무제 ‘원상제’를 탄생시키는 등 왕권정책을 폅니다.

국토의 균등한 발전을 위해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고, 국가수입을 위해 현직자에게만 토지를 지급하는 ‘직전법(職田法)’을 시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집현전은 폐지하였으나 <역대병요> <국조보감>등 많은 서적을 편찬하고, 왕권정치의 기준이 되고 조선만의 체계적인 법전 <경국대전(經國大典)>작업을 시작한 점도 특이할 만합니다.

그는 자신의 사적 욕망을 위해 할아버지 태종 이방원만큼이나 비열했지만, 정당성없이 끔찍했던 역사의 그늘에서 죄의식이 심했습니다.

세조 3년, 의경세자가 갑자기 병에 걸려 죽고, 이어 둘째 해양대군의 세자빈(한명회의 셋째딸)이 원자를 낳다 죽고, 세조 9년에 또 그 원자가 세상을 떠나자, 구천의 원혼들이 자신을 저주한다는 공포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이로인해 확대된 야사에는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가 꿈 속에서 침을 뱉어 세조의 피부병이 만들어졌다는 둥 혹은 세조가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쳤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두려움으로 인한 마음의 병이 심해지자 절을 다니며 죄를 뉘우치고 원혼을 달랬다고도 전합니다. 이런 공포에 벗어나려는 세조가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불교에 의지하고 지원하기도 하면서 신하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습니다.

<실록>은 세조는 평소에는 건강에 자신했지만, 풍습(風濕)의 병을 앓으며 온천욕을 즐겨하였다고 전합니다.

세조 9년 9월 27일 효령대군에게 “내가 어렸을 때 방장한 혈기로써 병을 이겼는데, 여러 해 전부터 질병이 끊어지지않으니, 일찍이 온천에서 목욕하는 것으로 이를 다스린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세조 12년 10월 2일의 기록에는 그의 질병이 더욱 분명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임금이 한계희, 임원준, 김상진을 불러 말하기를, 꿈 속에 나는 생각하기를, 현호색(玄胡索)을 먹으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여겨서 이를 먹었떠니 과연 가슴과 배의 아픈 증세라 조금 덜어지게 되었으니, 이것이 무슨 약인가? 이에 현호색을 가미한 칠기탕(七氣湯)을 올렸으니 과연 병환이 나았다.”

<동의보감>에서 “칠기(七氣)란 기뻐하고 성내고 생각하고 근심하고 놀라고 무서워하는 것들을 말한다. 이 칠기가 서로 어울려서 뭉친 것이 솜이나 엷은 막 같기도 하고 심하면 매화씨같다. 이러한 것이 목구멍을 막아서 뱉으려 해도 뱉어지지 않으며 삼키려 해도 삼켜지지 않는다. 속이 더부룩하면서 음식을 먹지 못하거나 기가 치밀어서 숨이 몹시 차게 된다. 심해지면 덩어리가 되어서 명치 밑과 배에 덩어리가 생기며 통증이 발작하며 숨이 끊어질 것 같다. 이럴 때 칠기탕(七氣湯)을 쓴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세조는 52세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관절이나 신경통으로 추정되는 풍습병(風濕病), 마음을 짓누르는 정신질환과 불면증, 피부병 등에 시달리다가 붕어(崩御)하셨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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