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환의 시간여행] [30] "햄버거란 고기로 앙꼬 넣은 빵조각" 한때 '식생활 개선용 영양식' 취급
1973년 3월 서울시가 시민의 식생활 개선을 위해 백화점·수영장 등 사람 많은 곳마다 새로운 식당을 운영토록 한다고 발표했다. 다름 아닌 '햄버거 식당'이었다. 식생활 개선을 위해 햄버거라니? 고개가 갸우뚱해질지 모르지만 1970년대라면 사정은 달랐다. 당시 국민 하루 평균 섭취 열량은 2105㎉로, 권장량(2400㎉)에 한참 못 미쳤다. 1인당 한 해 쇠고기 섭취량은 겨우 1.17kg. 오늘날 국민 평균 섭취량(10.8 kg)의 10분의 1 정도였다. 부실한 반찬에 밥 한 그릇 먹는 것보다 햄버거 쪽이 낫다고 여길 만했다. 서양 음식에 대한 막연한 환상도 햄버거를 영양식으로 평가하게 하는 데 한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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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에 대중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햄버거는 처음엔 모두 국내 제품이었다. 혼·분식 정책을 거국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던 제3공화국 정부는 햄버거 보급에 힘을 실었다. 영양학 교수마다 집집마다 새로운 식생활을 하자며 햄버거 만들어 먹는 법을 소개했다. 1979년 '세계아동의 해'를 맞아 한국 식생활개발연구회가 내놓은 '어린이 영양식' 6가지 중 첫째도 햄버거였다. 1975년 어느 국산 햄버거 광고의 카피는 '지금은 식생활을 개선할 때'였다. 햄버거의 특징으로 간편하다는 점보다 '동물성 단백질, 비타민 등 영양이 풍부하다'는 점을 먼저 내세워 광고했다. 이 무렵 햄버거가 영양가 높고 간편한 대용 식품이란 평가를 받은 건 분명했다. 하지만 한국인 대다수의 입맛까지 사로잡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1986년 조사 결과 패스트 푸드점 고객이 선호하는 메뉴 1위는 아이스크림이었고, 프라이드 치킨, 김밥이 2, 3위를 차지했다. 햄버거의 인기 순위는 떡볶이, 군만두보다 뒤진 6위에 그쳤다. 1988년 서울 시내 중·고생 1228명 상대의 조사에서도 햄버거는 식사용(17.8%)보다는 간식용(82%)으로 소비되고 있었다. 따끈한 국물 곁들여 쌀밥 한 그릇 먹어야 제대로 식사한 것으로 여기던 우리에게 햄버거란 한 끼 식사라기보다는 '괴기(고기)로 앙꼬 넣은 빵 쪼가리'(1986년 박범신 소설 '불의 나라')로 여겨진 듯했다.
이 땅에서 외국 브랜드 햄버거의 본격적 전쟁이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전개된 것도 우리 식성과 무관하지 않다. 리바이스 청바지, 코카콜라와 함께 3대 미국 상품으로 꼽힌 맥도널드 햄버거는 미국 메이저 햄버거 중 가장 늦게 1988년 3월 국내 상륙했다. 시장 진출 움직임을 시작한 때로부터 서울에 1호점을 열 때까지 5년이나 걸렸다. 한국인 입맛에 대한 염려 때문에 망설인 것이다. 1960년대 후반 맥도널드가 한국 시장 조사를 벌인 뒤 '진출 보류' 결론을 내리게 된 첫째 이유는 "한국인들은 물기 없이 못 먹는 식성을 가져서 건성인 햄버거와 맞지 않는다"는 점이었다고 알려져 있다(조선일보 1988년 4월 10일자). 미국 최대 햄버거는 한국인 입맛이 바뀔 때까지 20년을 기다린 셈이다.
그렇게 신중하게 진입했던 외국 햄버거 프랜차이즈들은 국내 시장을 휩쓸고 있다. 지난 7월 22일 국내 상륙한 뉴욕 수제 햄버거 '쉐이크쉑' 매장엔 폭염 속에서도 매일 수백명이 2시간씩 줄을 선다. 40년 전엔 맛보다 영양 생각해서 먹자던 햄버거가 이젠 정크 푸드라는 손가락질도 아랑곳없이 '맛있어서 찾는 음식'이 됐다. 우리 입맛의 변화가 초래한 햄버거 지위의 반전이라고나 할까.
조선일보
[김명환의 시간여행] [31] 해외여행 '별따기'… '관광' 불허 40년, 유학 떠나는 석사 이름도 신문에 실려
1969년 1월 초 법무부 출입국관리사무소가 '지난 1년간 해외여행을 가장 많이 한 국내 인사 10명'을 발표했다. 1위를 차지한 서갑호 방림방적 사장의 출국 횟수는 21회로 꽤 많지만, 3위부터는 횟수가 한 자릿수다. 8위에 오른 기업인은 연 5회 다녀왔다. 당시엔 한 해 5번 이상 출국한 사람이 3000만 국민 중 단 8명뿐이었다는 이야기다. 오늘날 비행기를 그 정도 타본 사람은 대략 몇십만명이 넘는다. 우리의 해외여행은 반세기 동안 극에서 극으로 변화했다.
1989년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 전까지 41년간 한국인은 해외 관광은 꿈도 못 꿨다. 정부는 외화 절약을 이유로 출국을 극도로 억제했다. 공무든 비즈니스든 업무를 보러 가거나 유학을 떠나는 사람에게만 여권을 발급해 줬다. 업무 출장의 경우에도 관련 부처의 추천서부터 받아야 했다. 부처 추천을 받은 사람을 외무부의 해외여행 심의위원회가 다시 심사했다. 한번 비행기 타는 게 별따기만큼 어려웠다. 1970년 해외 출장 신청은 1000건이 넘었지만 심사에서 3분의 2가 퇴짜를 맞았다. 모호한 '세미나 참석' 따위는 무조건 불허했고, '기술 습득' 혹은 수출 관계 여행쯤 돼야 허가가 났다. 어떤 사람은 1주일간 해외 출장 가려고 외무·국방·법무·공보부를 도합 12번 돌았다. '출국 절차가 거의 사람을 고문하는 격'이란 말이 나왔다. 그런 시절에도 문화·학술·경제 등 온갖 '시찰' 명목으로 허가를 받아낸 얌체족의 편법 관광과 정치인의 놀자판 외유는 계속됐다. 그런 사람 중엔 귀국 때 외제 재킷을 몇 겹 껴입고 입국하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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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행이 귀한 일이어서일까, 1960~1970년대 일간신문은 '오늘의 해외 출국·입국자'를 고정란에 매일 소개했다. 유명 인사만 실린 게 아니다. 출국란엔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 유학차 출국한 법학석사 ○○○씨', 입국란에는 '타이베이서 열린 친선 골프대회 참가하고 돌아온 의사 △△△씨' 이름이 실렸다. 특별한 기회를 얻어 나갔다 왔으니 체험은 국민과 공유해야 했다. '런던의 버스 정류장에선 사람들이 한 줄로 줄을 서더라' '돈을 넣으면 물건과 거스름돈이 척척 나오는 일본의 자동판매기가 어찌나 신통하던지 잔돈푼깨나 날렸다' '뉴욕의 미니스커트 여성을 처음 보고 정신이 아찔해졌다'는 식의 견문기가 신문에 크게 실렸다. 유신 시절인 1976년 정부는 '해외여행자들을 통해 국정에 유용한 자료를 수집한다'며 공무원·민간인 가리지 않고 해외에 다녀온 사람들에게 보고서까지 제출하게 했다. ▲교역할 만한 상품 ▲본받을 만한 사회제도 ▲교민의 동향 등 8개항 중 하나를 골라 적어 내도록 했다. 어떤 사람은 '영국인들은 아주 예절 바르더라'는 등 한심한 수준의 글을 써 냈다(조선일보 1976년 6월 9일자).
해외관광이 전면 자유화된 지 올해로 27년밖에 안 됐다. 묶여 있던 시기보다도 짧지만 관광객의 증가는 가히 폭발적이다. 작년 해외 관광 다녀온 사람은 1910만명으로 전 인구의 37%쯤 된다. 일본은 13%인데 그 3배에 육박한다. 올해엔 더 늘어나 2300만명 이상이 다녀올 듯하다. 노는 거야 자유지만 관광수지 적자가 61억달러에 이른다는 소식은 씁쓸하다. 오래 묶여 있던 바깥 구경에 대한 갈증을 풀려는 '거대한 반작용'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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