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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환 外 시간여행·문학 기행기

[김명환의 시간여행] [32] 에어컨 1대 1500만원…[김명환의 시간여행] [33] 60년대 비키니 상륙…

by 까망잉크 2023. 4. 18.

[김명환의 시간여행] [32] 에어컨 1대 1500만원… 특수층의 사치품… 기관장 방에만 틀어 직원들은 땀 뻘뻘

김명환 사료연구실장
입력 2016.08.17. 03:06
 
1970년 7월 26일 남산 중턱에 개관한 '어린이회관'이 뜻밖의 사태로 3일 만에 휴관에 들어갔다. 매일 3만여 명의 인파가 몰려 전시물 수십 점이 파손되는 바람에 정상 운영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관객이 폭증한 건 첫 어린이 복지 시설에 쏠린 관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중요한 원인은 또 있었다. 당시 속속 보급되고 있던 첨단 시설인 에어컨을 회관에 잘 갖춘 게 문제였다. 삼복더위 속 서늘한 냉풍을 맛본 사람들이 통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수용 인원은 3000명인데 1만8000명이 실내에 북적댔다. 도시락까지 싸와 종일 죽치고 있는 어린이들도 많았다.
1978년 삼복더위 속 전국 최고기온을 기록하던 대구에서 에어컨을 설치한 택시가 처음 등장하자 조선일보는 4면 톱기사로 대서특필했다. 당시 자동차 에어컨이란 이만저만한 사치가 아니었다.(1978년 7월 18일 자)

반세기 전 첫 등장 때의 에어컨이란 주로 특별한 공공건물마다 설치된 '꿈의 시설'이었다. 가정용은 대당 가격이 오늘의 화폐 가치로 약 1500만원이나 됐다. 1971년 전국에서 전기를 쓰는 200만 가정에 설치된 에어컨은 1만7600대뿐이었다. 그야말로 상위 1%도 되지 않는 부유층의 사치품이었다. 자동차 에어컨은 호사 중의 호사였다. 1978년 여름 전국 최고기온을 기록하던 대구에서 '냉방완비' 표지판을 붙인 '에어콘 택시'가 최초로 등장하자 조선일보는 4면 톱기사로 대서특필했다.

1960~1970년대엔 공공건물 중에서도 '힘 있는' 곳부터 에어컨이 돌아갔다. 국립극장이 에어컨이 없어 연중 100일을 휴관하고, 김포공항도 에어컨을 안 틀어 외국 손님들 항의가 빗발쳤지만 정부 주요기관은 '빵빵하게' 틀어댔다. 서울 태평로 국회의사당엔 1969년 대형 에어컨이 설치됐다. 냉풍 출구 중 하나가 총리석 바로 위 천장에 큼지막하게 뚫려 있었는데 이게 화근이었다. 1969년 7월 대정부질문 답변을 위해 국회에 매일 출석하던 정일권 총리는 고성능 에어컨의 직사풍을 온종일 머리 꼭대기에 맞다가 1주일 만에 끝내 감기가 들었다. 찬바람을 도저히 견디지 못한 정 총리가 총리석을 떠나 이곳저곳 전전하는 바람에 질문을 하려던 야당의원이 한참 두리번거리며 총리를 찾는 진풍경도 빚어졌다.(조선일보 1969년 7월 10일 자) 세종로 정부종합청사엔 1971년 에어컨이 설치됐다. 얼마나 세게 틀었는지 직원들이 추워서 스웨터를 걸쳐 입었다. 1977년 여름 30도가 넘는 한증막 더위가 이어질 때도 정부종합청사는 공무원들의 집무에 지장이 없도록 한다며 에어컨을 펑펑 틀어 실온을 20도로 낮춰 유지했다. 권위주의 시절엔 냉기의 분배도 비민주적이었다. 1977년 서울시교육청에서 에어컨이 돌아간 방은 교육감실과 부교육감실뿐이었다. 다른 방은 선풍기만 돌리게 했다. 오늘 같으면 직원들의 집단 반발이 일어나고도 남을 상황이지만 그땐 달랐다. 직원들은 '우리에게도 찬바람을 달라'고 외치는 대신 '교육감님 방에 결재받으러 가 있는 동안 땀 식히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올해 기록적 폭염 속에 가정집 에어컨 전기료 누진제가 도마에 올라 민심이 들끓었다. 에어컨 냉풍을 돈 많은 순으로 쏘이던 시절의 누진제와 '냉풍 대중화 시대' 사이의 불화가 근본적 문제다. 개선안을 긴급 논의하던 지난 11일의 새누리당 대표회의실 에어컨의 적정 온도가 18도로 맞춰져 있어 언론의 질타를 받았다. 정치인들 의식도 에어컨을 마구 틀어 20도 이하로 냉방 하던 그 옛날 '높으신 분'들 수준에 머물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조선일보

 

[김명환의 시간여행] [33] 60년대 비키니 상륙… '해괴망측한 꼴' "노출 여성은 娼婦 근성 있다" 비난도

김명환 사료연구실장
입력 2016.08.24. 03:00
 
 
1971년 백화점에 선보인 초창기 비키니(왼쪽·조선일보 1971년 7월 21일자). 당시 많은 이들을 경악하게 한 옷이지만, 피부를 더 가리도록 만들었다는 오늘날의 래시가드(오른쪽)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여자들이 알몸에 겨우 그곳만을 형식적으로 약간 가렸다." 1966년 여름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에 '해괴망측한 꼴'의 여성들이 나타났다. 비키니의 본격 상륙이다. 프랑스 수영복 디자이너 루이 레아르의 손에서 탄생한 게 l946년이니 20년 걸렸다. 초창기 국내의 비키니란 오늘에 비하면 무척 '얌전'했다. 상의는 상반신을 꽤 넓게 가렸고 하의는 오늘의 핫팬츠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벌건 대낮에 젊은 여자가 공공장소에서 배꼽과 허벅지를 드러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격이 컸던 듯하다. 신문에는 '옛날 할아버지가 봤으면 기절초풍했을 것'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노출증'이라는 식의 비키니 때리기가 이어졌다. 여자들이 정신 나갔다고 여겼는지 1972년 두 신문은 약속이나 한 듯 정신과 의사에게 비키니 유행을 진단하는 글을 받아 실었다. 대학병원 정신과 과장인 의학박사는 기고에서 '욕구불만을 느끼며 사는 여성들이 차원 낮은 만족이라도 얻으려고 자기 몸을 노출하는 것' '여자들의 노출은 남자에 대한 열등의식 때문'이라며 비키니 입는 여성들을 '비정상'으로 깎아내렸다. 어느 유명 작가는 한술 더 떴다. "(벗은 몸을 과시하는) 미녀들의 마음에 창부(娼婦)적인 근성이 있다고 하면 모독이 될까"라고 아슬아슬한 수위로 글을 썼다. 오늘 같으면 몰매 맞을 표현들이다. 비키니와 미니스커트가 한창 유행하던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렸다. 한국의 노출 패션이 북측 인사들 눈까지 휘둥그레지게 만들었다. 9월 13일 워커힐에서 비키니 차림 댄서들의 무용을 관람하던 북한 기자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제국주의자들이 버려놨구먼!"(조선일보 1972년 9월 14일자)

노출 패션을 방치할 수 없다고 여겼는지 정부는 10월 유신 직후인 1973년 초 경범죄처벌법을 더 엄하게 개정했다. 노출을 금하는 치부를 '배꼽, 젖꼭지, 둔부'로 규정하자 배꼽을 드러내는 비키니 애용자들이 불안해했다. 그러나 같은 배꼽 노출이라도 해수욕장에서는 예외적으로 묵인하고, 그 밖의 공공장소에서는 금지됐다. 실제로 1975년 8월 소양댐에서 비키니를 입고 활보하던 30대 여성이 경찰의 단속을 받기도 했다.

탄생 70년을 맞은 비키니가 이제 수명을 다해 가는 것일까. 올해 피서지에서 비키니는 퇴조하고, 몸을 더 많이 가리는 물놀이 옷인 래시가드(rash guard)가 유행의 첨단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2016년 여성들이 바닷가에서 피부 노출을 줄이게 된 이유가 궁금해진다. 여성들이 보수적이 됐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부끄러워서 피부를 더 가리는 게 아니라 남에게 보이기 싫은 군살을 가리려고 래시가드를 입는다고 한다. 자외선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하려는 동기도 빼놓을 수 없다. 또 한 가지, 지난 세기에 비해 풍속과 의식이 경천동지할 만큼 개방적으로 변한 오늘날, 비키니 정도의 세미 누드는 진부해져 버렸기 때문은 아닐까. 여름이면 가슴을 노출한 여성들로 메워졌던 프랑스 칸 해변에서 2009년쯤부터 토플리스 미녀들이 거의 자취를 감춘 일이 떠오른다. 당시 프랑스 언론의 진단은 이랬다. "처음엔 가슴 노출이란 충격 그 자체였다. 그녀들은 세상의 이목을 끌며 페미니즘을 주창했다. 이제 더 이상 토플리스는 충격을 주지도 못하고 특별한 주목을 받지도 못하는 시대가 되어버렸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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