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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환 外 시간여행·문학 기행기

[김명환의 시간여행] [34] 50년 전엔 상어 지느러미가 비료 원료… [김명환의 시간여행] [35] 히트작 상영관마다 암표상 100여명…

by 까망잉크 2023. 4. 30.

[김명환의 시간여행] [34] 50년 전엔 상어 지느러미가 비료 원료… 수출 가격 치솟자 '국내 소비 전면 금지'

김명환 사료연구실장
입력 2016.08.31. 03:09업데이트 2016.08.31. 08:25
 
 

상어의 부위 중 1960년대까지 한국에선 식용으로 쓰지 않고 썩혀서 비료나 만들던 부위는? 상어 지느러미다. 중국 3대 진미라는 최고급 요리 재료를 기껏 비료 원료로 썼다니…. 샥스핀 1㎏에 27만원쯤 하는 오늘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놀랍다. 그때 그 지느러미는 질기고 딱딱한 생선 찌꺼기일 뿐이었다. 이 천덕꾸러기 부위가 이 땅에서 '신분 상승'을 하게 된 건 1960년대 중반쯤부터다. 홍콩, 대만 등에서 비싼 값에 팔린다는 걸 알아차리고 수출을 시작했다. 외화 획득을 위해 개구리에서 오줌까지 수출하던 시절이니 이보다 반가운 일도 없었다. 신문은 "지금까지 상어 지느러미를 대단치 않게 여겨 비료로 쓰거나 겨우 기름을 짜는 정도였지만 이제 당당히 달러를 벌어들이고 있다"고 썼다. 기사 제목은 '이것도 팔리고 있다'.

'이것도 팔리고 있다'라는 제목 아래 상어 지느러미를 이색 수출품으로 소개한 50년 전 신문기사. '이제껏 썩혀서 비료로나 쓰던 상어의 지느러미'라는 사진 설명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경향신문 1966년 9월 3일자).

부산, 목포 등지에서 잡힌 국내산 상어 지느러미는 해외에서의 평가도 좋았다.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주문이 늘어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1971년엔 원양어업을 통해 잡은 물량까지 팔아 한 해 100t이나 수출했다. 정부는 1972년부터 상어 지느러미를 '역점 수출품'으로 지정하고 관련 업체에 자금 지원까지 했다. 같은 해 4월엔 상어 지느러미의 국내 소비를 전면 금지했다. "우리끼리 먹는 건 꾹 참고, 일단 외화를 벌자"는 뜻이었다.

상어는 원양어선의 참치잡이 그물에 잘 걸려들었다. 선원들은 상어의 지느러미를 말린 뒤 외국 기지에 기항할 때마다 팔아 짭짤한 용돈 벌이를 했다. 수산 회사들은 고생하는 선원들 처지를 고려해 일종의 보너스처럼 상어 지느러미를 현지에서 팔아 쓰게 했다. 황금이 고이는 곳에 늘 다툼이 끼어든다. 1979년 4월엔 중남미 니카라과 부근에서 조업하던 한국 참치잡이 어선 선원들이 상어 지느러미 판매금 분배 문제로 선장과 충돌한 끝에 선장을 감금하는 선상 반란까지 일으키기도 했다(조선일보 1979년 7월 22일자).

 

1970년대 들어 샥스핀 맛은 한국인들 혀와도 친해지기 시작했다. 1972년 9월 남북적십자 회담을 위해 평양을 찾은 우리 대표단에게 북측이 상어 지느러미 요리가 포함된 만찬을 냈다. 그러자 우리도 질 수 없다는 듯 며칠 뒤 북한 대표단이 서울을 방문했을 땐 상어 지느러미는 물론 프랑스에서 공수한 타조 간, 대만에서 들여온 제비집 요리 등으로 초호화판 메뉴를 차려냈다. '외화를 들여서까지 북측 인사들을 호화판으로 접대한 것은 한심스러운 일'이라는 시민들 비판이 나왔다.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식탁에 오른 먹거리의 운명 중 상어 지느러미만큼 반전(反轉)을 겪은 것도 드물다. 한때의 음식물 쓰레기는 최고급 요리 재료가 됐다. 그래도 여전히 상어 지느러미는 쉬운 음식은 아니다. 1인분 15만원까지 한다니 호화 사치 요리다. 게다가 한 해 7300만 마리의 상어를 잡아 지느러미만 떼어내고 버림으로써 상어에게 극도의 고통을 안기고 멸종 위기까지 부른다며 국제사회에선 '샥스핀 먹지 말기' 운동까지 펼친다. 우리나라에도 이 운동이 상륙했고, 국내 항공사들도 2013년부터 샥스핀 운송을 거부하고 있다. 이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 신임 지도부의 청와대 오찬에 샥스핀이 올랐다. 호화 사치와 생태계 파괴라는 두 가지 비판에도 꿈쩍 않은 무신경이 놀랍다.

조선일보

 

 

[김명환의 시간여행] [35] 히트작 상영관마다 암표상 100여명… '빠삐용' 암표 팔아 집 한 채 사기도

김명환 사료연구실장
입력 2016.09.07. 03:09
 

1957년 말 신문에 '올해 새로 생긴 직업' 한 가지가 소개됐다. '인기 영화를 상영 중인 극장 앞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나타난 소년들'이 그 주인공이었다. 이들은 티켓이 매진돼 난감해하는 관객들에게 다가와 "좋은 자리 있어요"라고 속삭이며 500환짜리 표를 800환에 사라고 내밀었다. 극장 암표상의 등장이었다. 소년들의 하루 수입은 무려 1만환(오늘의 물가로 약 13만원)씩이나 됐다(경향신문 1957년 12월 28일자). 1960~1970년대가 되자 암표상은 중년 여성들로 교체됐다. 이렇다 할 오락거리가 없던 때여서 영화관은 주말마다 미어터졌고, 암표상도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났다. 예매 시스템도 없이 현장에서만 표를 팔던 때여서, 주말에 인기 있는 영화는 암표를 사지 않고는 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국도, 대한, 명보극장 등 '일류 극장'마다 암표상은 80~100명씩 진을 쳤다. "극장 앞은 법외(法外) 지대냐"는 시민 원성이 튀어나왔다.

‘암표 사지 말자’는 문구를 대문짝만 하게 넣은 1974년의 영화 ‘빠삐용’ 광고(위·조선일보 1974년 9월 29일 자)와 극장 암표상이라는 ‘신직업’의 탄생을 알린 1957년 신문 삽화.

1978년 조선일보 취재 결과 서울 개봉관 히트작의 표는 40~70%까지 암표상들 손에 넘어간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1300원짜리 영화표 한 장을 4000원(오늘의 약 2만3000원)까지 올려 받는 것도 예사였다. 암표상 한 명이 하루 10만원(오늘의 약 57만원)의 수입을 거뜬히 올렸다. 10년 동안 수억대의 돈을 번 암표상이 10여명쯤 됐다(조선일보 1978년 11월 5일자). 특히 1974년 추석 대목에 개봉된 '빠삐용'이 명동의 한 영화관에서 87일간이나 상영될 정도로 대히트를 하자 암표도 덩달아 대히트를 했다. '빠삐용' 암표 하나만 팔아 집 한 채를 산 어느 암표상의 사례는 충무로의 전설이 됐다. 암표상들의 주말은 흐뭇한 하루였는지 몰라도, 모처럼 기분 전환하러 나온 시민에게는 기분 잡치는 하루가 됐다. 1978년 '영화표 사기에 지친' 중년 남자는 아예 영화 구경을 포기하고는 "택시 타기도 어렵고 표 사기도 어렵고, 어디를 가나 이 모양이니 이젠 밖에 나오는 것도 진절머리가 난다"고 고개를 저었다.

당국은 60년간 끊임없이 암표상 소탕을 외쳤다. 1967년 경찰은 암표상을 '비시민적 제악(諸惡)' 중 가장 질이 나쁜 행위로 규정하고 대대적으로 단속했다. 이듬해인 1968년 말엔 '불도저 시장'이라 불린 김현옥 서울시장이 90여개 극장 대표들을 모조리 집합시켜 놓고 '암표가 또 나돌면 극장에 행정 조치를 취하겠다'고 경고했다. 그 덕택인지, 그해 연말 극장가에서 해방 후 처음으로 암표상이 사라졌다. 그러나 그 효과는 일 년도 못 갔다.

검찰도 경찰도 뿌리 뽑지 못한 극장 암표상을 몰아낸 건 온라인 예매 시스템이다. 1990년대 말 등장한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온라인 예매를 도입하면서 암표상들이 설칠 공간은 사라졌다. '암표'라는 바이러스 자체가 사라진 건 아니다. 암표상은 아이돌 그룹 공연장이나 프로야구장 등으로 활동 공간을 옮겼다. 최근 폐막한 리우올림픽에서도 아일랜드 IOC 위원이 암표를 팔다가 적발돼 국제적 망신까지 당했다. 미국의 월터 블록 박사 등 시장경제 신봉자들은 암표 거래야말로 수요공급의 법칙을 보여주는 교과서적 사례라며 제한적 옹호론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티켓을 빼돌려 암표로 판 행위 때문에 차례대로 줄을 선 사람의 권리가 침해됐으니, 암표 판매란 소탕해야 할 부당한 상거래인 것만은 분명하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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