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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역사) 이야기

“반은 강 속에 있고 반은 뱃속에 있다.[半在江中半在船]”

by 까망잉크 2009. 1. 27.

 

 

태조의 함흥 주필(咸興駐蹕= 임금이 머무는 것)

함흥차사

 

        

 

 

방석의 변이 있은 뒤에 태조가 왕위를 버리고 함흥으로 갔다. 태종이 여러 번 중사(中使)를 보내어 문안을 하였는데, 태조가 번번이 활을 버티고 기다리고 있어서 전후 여러 차례 갔던 사자가 감히 문안을 전달하지 못하였다.

 

성석린(成石璘)은 태조의 옛 친구로 그가 자청하여 태조의 뜻을 돌이킬 것을 다짐하므로 태종이 허락하였다. 석린이 백마를 타고 베옷 차림으로 과객같이 하고 말에서 내려 불을 피워 밥을 짓는 시늉을 하였더니, 태조가 바라보고 내시를 시켜 가 보게 하였다.

석린이 “용무가 있어 지나가다가 날이 저물어 말을 매고 유숙하려 한다.” 말하니, 내시가 돌아가서 그대로 태조에게 아뢰었다.

 

태조가 매우 기뻐하여 곧 불렀다. 석린이 조용히 인륜의 변고를 처리하는 도리를 진술하니,

태조가 변색하여 이르기를, “너도 너의 임금을 위하여 나를 달래려고 온 것이 아니냐.” 하였다.

석린이 대답하여 아뢰기를, “신이 만약 그래서 왔다면, 신의 자손은 반드시 눈이 멀어 장님이 될 것입니다.” 하니, 태조는 이 말을 믿었다.

그래서 양궁(兩宮 태조와 태종)이 이때부터 화합해졌으나, 뒤에 석린의 두 아들은 과연 눈이 멀었다. 《축수편(逐睡篇)》

 

석린의 맏아들 지도(至道)와 지도의 아들 창산군(昌山君) 귀수(龜壽)와 귀수의 아들이 다 태중에서부터 장님이 되어 삼대를 이었고, 석린의 작은 아들 발도(發道)는 후사가 없었다. 《명신록》

 

당시에 문안사(問安使) 중에 한 사람도 돌아온 이가 없었다. 태종이 여러 신하들에게 묻기를, “누가 갈 수 있는가?” 하니 응하는 사람이 없었으나, 판승추부사(判承樞府事) 박순(朴淳)이 자청하여 간다고 하였다.

가는데 하인도 딸리지 않고 스스로 새끼 딸린 어미 말을 타고 함흥에 들어가서, 태조 있는 곳을 바라보고 일부러 그 새끼 말을 나무에 매어 놓고 그 어미 말을 타고 나아가니, 어미 말이 머뭇거리면서 뒤를 돌아보고 서로 부르며 울고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태조를 뵙자, 태조는 말이 하는 짓을 보고 괴이하게 여겨 물었다. 그가 아뢰기를, “새끼 말이 길가는 데 방해가 되어 매어 놓았더니, 어미 말과 새끼 말이 서로 떨어지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비록 미물이라 하더라도 지친의 정은 있는 모양입니다.” 하고, 풍자하여 비유하니, 태조가 척연(慼然)히 슬퍼하고 잠저에 있을 때 사귄 옛 친구로서 머물러 있게 하고 보내지 않았다.

 

하루는 태조가 박순과 더불어 장기를 두고 있었는데 마침 쥐가 그 새끼를 안고 지붕 모퉁이에서 떨어져 죽을 지경에 이르렀어도 서로 떨어지지 않았다. 박순이 다시 장기판을 제쳐놓고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더욱 간절하게 아뢰니, 태조가 마침내 서울로 돌아갈 것을 허락하였다.

 

박순이 서울로 돌아가겠다는 태조의 허락을 듣고 곧 그 자리를 하직하고 떠나니, 태조를 따라와 모시고 있던 여러 신하들이 극력 그를 죽일 것을 청하였다. 태조는 그가 용흥강(龍興江)을 이미 건너갔으리라고 생각된 뒤에야 허락하여 사자에게 칼을 주면서 이르기를, “만약 이미 강을 건넜거든 쫓지 말라.” 하였다.

박순은 병이 나 중도에서 체류하였다가 이때에 겨우 강에 도달하여 배에 오르고 아직 강을 건너지 못했으므로, 드디어 그의 허리를 베었다.

 

그때에 “반은 강 속에 있고 반은 뱃속에 있다.[半在江中半在船]” 하는 시가 있었다. 태조가 크게 놀라 애석하게 여겨 이르기를, “박순은 좋은 친구이다. 내가 마침내 전에 그에게 한 말을 저버리지 않으리라.” 하고, 드디어 남쪽에 있는 한양에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태종은 박순의 죽음을 듣고 곧 그의 공을 기록하고 벼슬을 증직하였으며, 또 화공에게 명하여 그의 반신을 그려서 그 사실을 나타내었다. 그의 부인 임씨(任氏)는 부고를 듣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노봉집 시장(老峯集諡狀)》 박순의 옛 마을은 고양(高陽)과 교하(交河)의 경계에 있다. 지금까지 그 마을을 부사문(府事門)이라 부른다.

 

태조는 처음에 덕원(德源)으로 갔다가 또 함흥으로 갔는데, 문안사(問安使)로 죽은 사람이 속출하였다. 태종이 태조께 돌아오시라고 청하고자 하였으나, 방법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 아뢰기를, “무학(無學)이면 능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므로, 태종이 물색하여 찾아서 간곡히 청하니, 무학이 어쩔 수 없이 함흥에 가서 태조를 뵈었다.

 

태조가 노하여 이르기를, “너도 또한 나를 달래러 왔구나.” 하니, 무학이 웃으면서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제 마음을 모르십니까. 빈도(貧道 승려가 겸손하게 자기를 가리키는 말)가 전하와 더불어 서로 안지가 수십 년인데, 오늘 특별히 전하를 위로하기 위하여 왔을 뿐입니다.” 하였다.

이에 태조의 안색이 조금 부드러워져서 머물러 함께 잤는데, 무학은 말을 할 때마다 언제나 태종의 단점을 이야기했다. 이렇게 하여 수십 일을 지내니, 태조가 굳게 믿었다.

 

하루는 밤중에 무학이 태조를 달래어 아뢰기를, “방원(芳遠 태종의 이름)이 진실로 죄가 있으나, 전하께서 사랑한 아들은 이미 다 죽고 다만 이 사람이 남아 있을 뿐이니, 만약 이 아들마저 끊어 버리면 전하가 평생 애써 이룬 대업을 장차 누구에게 맡기려고 하십니까. 남에게 부탁하는 것보다 차라니 내 혈속에게 주는 것이 나으니, 원컨대 신중히 생각해 보소서.” 하니, 태조가 그의 말이 꽤 그럴 듯하다고 생각하고 드디어 행차를 돌릴 뜻이 생겼다.

 

무학이 이어 급히 돌아갈 것을 권하였으나, 태조는 성 안으로 들어가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처음에는 소요산(逍遙山)에 이르러 두어 달 머물렀다가 그 길로 풍양(豐壤)에 가서 궁을 지어 거처하였다. 뒤에 무학이 죽은 데는 알지 못한다. 《오산설림(五山說林)》

 

태조가 함흥으로부터 돌아오니, 태종이 교외에 나가서 친히 맞이하면서 성대히 장막을 설치하였다.

하륜 등이 아뢰기를, “상왕의 노여움이 아직 다 풀어지지 않았으니, 모든 일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차일(遮日)에 받치는 높은 기둥은 의당 큰 나무를 써야 할 것입니다.” 하니, 태종이 허락하여 열 아름이나 되는 큰 나무로 기둥을 만들었다. 양전(兩殿 태조와 태종)이 서로 만나자, 태종이 면복(冕服)을 입고 나아가 뵈었는데, 태조가 바라보고 노한 얼굴빛으로 가졌던 동궁(彤弓)과 백우전(白羽箭)을 힘껏 당겨서 쏘았다. 태종이 급해서 차일 기둥에 의지하여 몸을 가렸으므로 화살이 그 기둥에 맞았다.

 

태조가 웃으면서 노기를 풀고 이르기를, “하늘이 시키는 것이다.” 하고, 이에 나라의 옥새를 주면서 이르기를, “네가 갖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니, 이제 가지고 가라.” 하였다. 태종이 눈물을 흘리면서 세 번 사양하다가 받았다.

 

마침내 잔치를 열고 태종이 잔을 받들어 헌수(獻壽)하려 할 때에 하륜 등이 몰래 아뢰기를, “술통 있는 곳에 가서 잔을 들어 헌수할 때에 친히 하지 말고 마땅히 내시에게 주어 드리시오.” 하므로, 태종이 또 그 말대로 하여 내시가 잔을 올렸다. 태조가 다 마시고 웃으면서 소매 속에서 쇠방망이를 찾아내어 자리 옆에 놓으면서 이르기를, “모두가 하늘이 시키는 것이다.” 하였다. 《축수편(逐睡篇)》

 

연려실기술 제1권 태조조 고사본말(太祖朝故事本末)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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