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시와 그림

가을 들녘망중한의

by 까망잉크 2010. 11. 5.

                                             

 

가을 들녘의 망중한   

 

                                                                                  허수아비 농부1111.jpg

 

 

빈손/ 이외수                                                                                         

                                         


해가 지면 우리는

어디서 모여 살리

저문 벌판을 절룩절룩 헤매다

결국은 제자리로 돌아와

살을 허는 허수아비


한 번 더 비 내리면

그때는 겨울이다그대는 먼 하늘 .

옥수수 마른 대궁은

저녁 바람에 서걱이고

끝으로

새 한 마리를  날린다.

 

 

 

예전 참 없이 사는 시절엔 그 무엇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있었을까마는, 쌀 한 톨, 그 나락 하나가 몹시 소중했었던 시절의 허수아비의 위용은 남달랐다.

어릴 적 할아버지, 이모를 만나러 가던 가을 들판 사이의 허수아비는 정말 자신의 소임대로 우리의 귀한 쌀알을 적들로부터 굳건히 지키기는 하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었으나, 한 가지 확실한 건 길을 지나는 누구건 그들이 존재하는 들판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풍요로와 졌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들의 존재가 거머리에 물리기를 마다하지 않고 모내기를 하고 피를 뽑으며, 장맛비에 물고를 트던 농부의 끈끈한 노력에 부응했는지에 대한 확신은 영원히 없을 것이나, 너무 오랜 세월 농부와 함께 동고동락을 하느라 다 헤져버린 누런 ‘난닝구’를 입고 해맑게 웃고 있던 그들의 모습은 누구에게나 근원 모를 그리움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도로를 달리다 차창 밖으로 우연히 만난 오늘의 허수아비는 분명 ‘저문 벌판을 절룩절룩 헤매다 살을 허는’ 그 시절의 허수아비는 아니었다.

논 여기저기에 모여 있는 볏단의 무더기를 보고 지난 1년의 일들을 회상하거나, 바쁜 일손을 놀리다 잠시 커피 한 잔, 담배 한 모금이 절실한 그냥 익숙한 우리들의 모습 그 자체일 뿐이었다.

사람인가 싶어 무심이 지나치다가도 무언지 확실치 않은 호기심에 나의 발걸음이 멈춘 것처럼, 오늘 이 들녘을 지나는 새들도 익숙지 않은 상황이 주는 긴장감에 더욱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는 비행이었기를 바래본다.

그래야 그를 의자에 앉히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농부의 손길이 더 의미 있을 테니까…….

 

<옮 김>

 

'시와 그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단풍 길 철길 따라   (0) 2010.11.14
가을 노트   (0) 2010.11.13
나 그 네  (0) 2010.11.01
주워들은 남 사연도 설운 한 잔이라  (0) 2010.10.17
귀뚜라미 슬픈 연가   (0) 2010.10.11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