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 1(주)하동신문
정 연 가(하동문화원장)
조선을 개창한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고려 공민왕때 삭방도만호겸 병마사였던 이자춘(李子春)의 차남으로 기록 되어 오는데, 이는 문제가 되는 구시대적 이야기다.
사실은 배는 다르지만 다섯 살 위인 이복형 이원계(李元桂)가 있었고, 그의 동복형은 젊었을 때 아우 이성계와 함께 사냥을 나갔다가 호랑이에게 기습 당해 목이 물려 죽었다.
이자춘은 아내가 셋이었다. 첫 부인은 영흥의 천호(千戶) 벼슬을 하던 최한기의 딸이었는데, 그 사이에 호환(虎患)으로 죽은 첫 아들과 차남 이성계, 딸이 하나 있어 뒤에 정화공주라하여, 도체찰사 조인벽(趙仁璧)에게 시집갔다.
이성계의 이복형 이원계를 낳은 이자춘의 둘째 부인은, 그의 노비 내은장이었는데 성씨는 이씨였다.
이성계는 나이 많은 이복형 이원계를 극히 존경했고, 그 자녀들도 가벼이 여기질 않았다. 이원계는 아버지의 품계를 이은 배다른 아우 이성계휘하에 들어가 아우를 성심으로 보필했다.
일찍이 공민왕 때 이성계를 도와 홍건적을 격퇴하는데 큰 공을 세워 2등공신에 책록 되고, 위화도회군 때 이성계와 뜻을 함께하여 회군공신에 들었다. 이성계는 형 이원계의 생모 이씨의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개국 후에 형을 개국공신 2등에 책록, 완산군으로 봉군까지하여 자손들도 챙겨 군(君)으로 호칭하게했다.
이자춘의 세 번째 아내는 역시 노비였던 고음가라는 여종으로 성씨는 김씨였다. 아들 이화(李和)를 낳으니, 이는 다섯 살 아래인 이성계의 이복 아우였다. 이화도 이성계휘하에서 전장을 누비며 공을 세웠고, 위화도회군 공신에 올랐다.
형 이성계의 개국에 적극 참여하여 개국1등공신에 책록 되고, 태조7년(1398) 왕자의 난때 이방원 편에 서서 정사1등공신에 올랐다.
뒤에 정종2년(1400) 이방원의 바로 위 형 방간(芳幹)이 이방원을 축출하려고 일으킨 2차 왕자의난 때도 이방원을 지지하여 난을 진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했다.
이리하여 이화는 조카 이방원이 가장 믿는 측근으로 신임 받아, 이방원이 등극하자 최고 관직인 영의정부사에 이르렀다. 그는 이방원 집권 7년째인 태종7년(1407), 태종의 처남 민무구(閔無咎)?무질(無疾) 형제가 남매 사이인 태종을 믿고 종친을 가볍게 여기며 방자하게 굴자 이들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려 그들 형제를 죽음으로 몰았다. 이리하여 이화는 더욱 태종의 신임을 받아 7명의 아들과 딸 하나까지 후한 대접을 받았다.
이처럼 이성계의 형제들은 비록 어머니는 달라도 우애가 돈독하여 새 왕조를 여는데 힘을 합쳤다. 이성계를 이자춘의 차남으로 고집한다면, 호환을 당해 죽은 아들을 아들로 치지 않았던지, 아니면 이복형 이원계를 뭉개 버렸던지 둘 중 하나다.
고쳐 살피고 이해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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