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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뒷 이야기

<조선왕조 뒷 이야기> 2

by 까망잉크 2018. 4. 25.

 

 

 

 

 

 

 

 

하동신문<조선왕조 뒷 이야기> 2


정  연  가(하동문화원장)


1392년 7월 17일, 이단(李但)으로 개명한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수창궁에서 성대한 즉위식을 갖고 새 왕조를 열었다.
태조 이단은 정식 혼례를 치른 정부인이 둘이었다.

여섯 아들을 둔 첫부인 한씨(韓氏)와, 뒤에 고려조의 권신 강윤성(康允成)의 딸 곡산강씨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했는데, 이는 그의 출세를 위한 정략적 냄새가 짙었다.
이 때문에 한씨는 심하게 마음고생을 하다가, 지난해 55세 나이로 그만 세상을 뜨니, 한참 뒤 정종때 비로소 신의왕후로 추존되었다.


8월 7일, 아들 둘을 낳은 강씨를 공식 왕비로 책봉하여 현비(顯妃)라 했고 뒤에 신덕왕후에 봉했다.
이어 세자책봉 문제가 대두되자, 한씨는 남편이 왕이 되기 전 죽었기로 왕비가 아니고, 자신이 명실상부한 왕비임으로 왕비 소생을 세자로 삼아야 한다는 강씨의 주장에 무게가 실려, 태조는 제일 막내인 11세의 의안대군 방석(芳碩)을 세자로 책봉하니, 이가 곧 조선 최초의 왕세자다.
왕비 강씨는 자기의 큰 아들 방번(芳蕃)을 세우려했으나 개국공신 정도전(鄭道傳).조준(趙浚) 등이, 방번은 깜이 못 된다고 극력 반대하여 일이 그렇게 되었다.
이리하여 태조왕실에 분란의 먹구름이 드리우니, 아버지를 도와 개국에 목숨을 걸었던 한씨 소생 아들들의 원한이 하늘을 찔렀고, 특히 다섯째 아들 방원(芳遠:태종)은 강씨의 소행에 이를 갈았다. 그런 분위기를 읽은 세자 방석은 자리가 그야말로 바늘 방석이었다.

태조5년(1396) 8월 13일, 문제의 신덕왕후 강씨가 죽고, 마침 태조도 몸에 병이 붙어 자리에 눕고 말았다.

눈에 불을 켜고 때를 노리던 이방원은 태조7년(1398) 8월 26일, 마침내 형제들과 합심, 세자의 측근 정도전.남은(南誾).변중량(卞仲良) 등을 죽이고, 방석을 세자 자리에서 밀어내 버렸다.
사실 정도전 등 세자 측근들은 진작부터 걸림돌이 되는 한씨 소생 아들들을 일망 타진할 틈을 노리다가 그만 탄로 나는 바람에 역습을 당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어미 잃은 병아리 신세의 세자 방석과 동복형 방번은, 목숨만은 살려 유배 보내는 모양새로 대궐문을 나섰는데, 하염없는 유배길에서 배경이 뻔한 자객의 칼에 목숨을 앗기니, 세자의 나이 17세, 형 방번은 18세였다.
참으로 바닥을 헤매는 민초 보다 못한 왕세자의 최후였다. 살아 입김이 거세던 강씨 아들들이, 애써 차려진 밥상을 차지하는 일은 하늘의 뜻이 아닌 것 같았다.

이리하여 조선 최초 세자의 운명을 비참했다. 이방원의 손자인 세종의 6남 금성대군이 방석의 후사를 잇다가, 금성대군이 형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기를 들고, 단종 복위사건에 관련하여 역적으로 몰려 죽는 까닭으로, 세종의 후궁 출신 밀성군 이침(李琛)의 아들 춘성군이 방석의 뒤를 이어 오늘날 전주이씨 의안대군파를 형성하였다.

태조와 한씨 사이에서 장자로 태어나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자로 떠 올랐으나 강씨의 반대로 세자가 되질 못한 방우(芳雨)는, 개국 직후 세상 보기 싫다는 듯 40세 나이로 죽었다.

둘째 방과(芳果)는 전혀 왕권에 관심이 없어, 방원이 당연히 세자가 되어야한다고 말해 왔는데, 태조의 반발과 민심을 우려해, 과도기적으로 2년 2개월간 복에 없는 왕(정종)노릇을 하다가 방원에게 자리를 물려줬다.
3남 방의(芳毅)는 정치 권력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더니 역시 40대 젊은 나이로 죽었다.

4남 방간(芳幹)은 욕심이 있어 아우 방원을 어떻게 해보려하다가 패하여, 충청도 홍주에 유배 당해 현지서 58세로 죽었다.
5남 방원은 어렵게 왕위에 올라 조선왕조의 기틀을 닦았는데, 강씨가 뼈골에 사뭇쳐 가장 서둘러 손을 쓴게 「서얼(庶孼) 차별제도」였다.

6남 방연(芳衍)도 일찍 요절하는 등, 태조의 여덟 왕자들 생애는, 후세에 여러 가지 의미들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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