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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신문<조선왕조 뒷 이야기> 2 정 연 가(하동문화원장) 1392년 7월 17일, 이단(李但)으로 개명한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수창궁에서 성대한 즉위식을 갖고 새 왕조를 열었다. 여섯 아들을 둔 첫부인 한씨(韓氏)와, 뒤에 고려조의 권신 강윤성(康允成)의 딸 곡산강씨를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했는데, 이는 그의 출세를 위한 정략적 냄새가 짙었다. 태조5년(1396) 8월 13일, 문제의 신덕왕후 강씨가 죽고, 마침 태조도 몸에 병이 붙어 자리에 눕고 말았다. 눈에 불을 켜고 때를 노리던 이방원은 태조7년(1398) 8월 26일, 마침내 형제들과 합심, 세자의 측근 정도전.남은(南誾).변중량(卞仲良) 등을 죽이고, 방석을 세자 자리에서 밀어내 버렸다. 이리하여 조선 최초 세자의 운명을 비참했다. 이방원의 손자인 세종의 6남 금성대군이 방석의 후사를 잇다가, 금성대군이 형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기를 들고, 단종 복위사건에 관련하여 역적으로 몰려 죽는 까닭으로, 세종의 후궁 출신 밀성군 이침(李琛)의 아들 춘성군이 방석의 뒤를 이어 오늘날 전주이씨 의안대군파를 형성하였다. 태조와 한씨 사이에서 장자로 태어나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자로 떠 올랐으나 강씨의 반대로 세자가 되질 못한 방우(芳雨)는, 개국 직후 세상 보기 싫다는 듯 40세 나이로 죽었다. 둘째 방과(芳果)는 전혀 왕권에 관심이 없어, 방원이 당연히 세자가 되어야한다고 말해 왔는데, 태조의 반발과 민심을 우려해, 과도기적으로 2년 2개월간 복에 없는 왕(정종)노릇을 하다가 방원에게 자리를 물려줬다. 4남 방간(芳幹)은 욕심이 있어 아우 방원을 어떻게 해보려하다가 패하여, 충청도 홍주에 유배 당해 현지서 58세로 죽었다. 6남 방연(芳衍)도 일찍 요절하는 등, 태조의 여덟 왕자들 생애는, 후세에 여러 가지 의미들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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