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선 왕조 뒷 이야기

<조선왕조 뒷 이야기> 8 효(孝)보다 충(忠)이 먼저다!

by 까망잉크 2018. 5. 6.

<조선왕조 뒷 이야기> 8 효(孝)보다 충(忠)이 먼저다!(주)하동신문  정  연  가(하동문화원장)

서기 1392년 7월 17일, 개경 수창궁에서 즉위식을 치르고 왕위에 오른 조선 태조 이성계는, 이튿날 전실 한씨 소생 아들과 며느리들을 모두 함께 불러 모았다. 앞으로 왕자들로서의 지킬 도리를 타일러 주기 위한 의미가 큰 자리였는데, 이런 중차대한 자리에 꼭 있어야 할 적장자 방우(芳雨) 내외가 나타나질 않았다. 비위가 상한 태조는 급히 사람을 보내 자리를 함께하기를 재촉했다. 그러나 서둘러 달려 온 내관에게 이방우는,
“효보다 충이 먼저라했다!”
며, 퉁명스러운 한마디로 자신의 속내를 들어 내고 기어이 나가질 않았다. 이방우는 그날로 짐을 꾸려 깊은 산속으로 숨어 버렸다. 격분한 태조는 8도에 긴급 수배령을 내려 아들의 소재를 찾느라 속을 끊였다.
이방우는 전주이씨 진안(鎭安)대군파 파시조다. 그는 마음만 달리했더라면 능히 태조의 뒤를 이을 세자가 될 수 있었으나, 고려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아버지와 등을 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일찍이 고려 조정에 나가 관직이 예의판서(禮儀判書-외무부장관)에 올라 정계의 중심에 있었다. 찬성사(贊成事) 지윤(池奫)의 딸을 아내로 맞았는데, 장인 지윤은 한동안 국정을 좌지 우지하다가 정적 최영(崔瑩) 등을 제거하려는 등, 권력 다툼 끝에 패하여, 15년전인 우왕3년 가족들과 함께 처형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사위인 이방우는 아버지의 그늘로 화를 피한 것으로 짐작 된다.
이방우는 창왕 즉위년(1388) 11월,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어, 밀직사(密直司-대통령실장) 강회백(姜淮伯)과 함께 명나라에 들어가 창왕을 새로 세웠음을 고하고 승인을 받으려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오기도하였던 고려 왕조의 중신이었다.
은거 하기를 결심한 이방우는, 태조 등극과 함께 진안군(鎭安君)에 봉해졌다가 곧 진안대군으로 진봉 되었고, 태조의 연고지였던 함경도 영흥땅 가까운 고원(高原)에 그의 생계 터전인 넓은 전답을 하사 받았다. 그러나 울적한 심경을 이겨 내질 못한 이방우는, 이듬해 40세 아까운 나이로 그만 복잡한 이승을 등지고 말았다.
태종1 8년(141 8), 우여곡절 끝에 옥좌에 올라 정신을 가다듬은 태종 이방원은, 맏형이었던 이방우를 챙겨 진한정효공(辰韓定孝公)에 추증하고 시호를 경효공(敬孝公)으로 내렸다. 「효」보다 「충」을 앞세웠던 고려 충신 이방우에게 「효」를 강조한 의미가 흥미롭다. 아마 저세상에서나마 아버지에 대한 「효」를 다하라는 뜻이 아니었던가 싶다.
이방우의 슬하는 모두 왕실의 각별한 보살핌을 받았다. 큰 아들 복근(福根)은 봉녕부원군(奉寧府院君)에 봉해졌고, 차남 덕근(德根)은 왕족에게만 주는 정2품 원윤(元尹)에 임명되었다. 원윤은 맡은 일 없이 놀고 먹을 수있게 넉넉한 전답을 내려 주는 명예관직이었다. 또 이방우의 딸은 유명한 목은 이색(李嗇)의 손자 이숙묘(李叔묘)에게 출가하였는데, 이숙묘는 세종의 총애로 형조판서(법무부장관), 판한성부사(判漢城府使-서울특별시장) 등을 역임하고, 만년에 특별히 지돈녕부사로 대접을 받았다. 거기다가 이방우의 처제들도 덩달아 호강을 누렸다.
이방우는 처제가 둘 있었는데, 아버지 지윤이 죄를 입어 처형 당할 때 당연히 함께 연좌되어 남의 집 종으로 배분 되어야 함에도, 특별한 배려로 태조에 이어 등극한 정종(定宗)의 후궁이 되어, 언니는 성빈, 자매는 숙의에 올라 궁궐 안에서 호사를 누렸다. 더구나 정비(正妃)에게서 왕자를 얻지 못한 정종은, 아들 둘을 낳은 후궁 성빈 지씨와, 3남 1녀를 낳은 숙의 지씨를 몹시 총애하였다.
개국에 뒤이어 벌어졌던「왕자의 난」은,「충」을 고집한 채 적장자로서 아버지의 창업에 반기를 든 이방우의 탓이 아니던가 싶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