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완조 뒷이야기> 10 선죽교의 접전(接戰)
정 연 가(하동문화원장)
조선 정종2년(1400) 1월 28일, 이날 개성 선죽교에서 큰 칼부림이 있었다. 태조 이성계의 4남 방간(芳幹)과 5남 방원(芳遠)이 다음 왕권을 노려 서로 목숨을 걸고 맞 붙으니, 이른바 제2차 「왕자의 난」이었다.
태조는 1398년 8월 방원이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사랑하던 세자 방석을 죽이자 비위가 틀어져, 9월에 왕위를 둘째 아들 방과(芳果)에게 물려주고 나 앉아 버렸다. 하지만 고려 조정에서 장군으로 재상 직위까지 올랐던 방과는, 원래 정치에 뜻이 없어, 세자는 당연히 방원이 되어야한다고 말하기도 했던 빈 욕심의 왕자였다. 그러나 방원은 아버지 태조의 마음을 헤아리고, 백성들의 눈치를 살펴 속내를 감추고 둘째형 방과가 옥좌에 앉도록 거들고 차기를 노렸던 것이다.
사실상 이미 방원의 측근들로 짜인 권력 구도에서, 들어 얹힌 셈의 왕노릇 2년을 버틴 정종은, 하루 속히 후계자를 정해 자리를 넘겨주어야했다. 그 무렵 정계 실력자는 방원의 장인 민제(閔霽)를 비롯한 이서(李舒)?하륜(河崙)?이거이(李居易) 등이었는데, 그들의 정치적 의향은 벌써 방원에게 기운지 오래였다. 그들은 아예 정종을 왕으로 치지 않았던지, 뒤에 정종이 상왕으로 물러 앉아 숨도 크게 쉬질 못한채 견디다가 63세 일기로 생을 마쳤는데, 묘호(廟號)를 올리지 않았다. 그가 세상을 뜬지 수백년이 흐른 숙종7년(1681)에야 비로소 「정종(定宗)」이라는 묘호를 정했으니, 그의 대접이 어떠했는지 짐작 할만하다.
정종이 왕좌에서 내려 앉고자하는 기미를 보이자, 평소에 권력욕이 강했던 방간이, 모두가 다음 왕이 될 왕자는 정안군 방원이라는 여론에 반기를 들고 은근히 다음 왕권을 노렸다.
방간은 제1차 「왕자의 난」때 정도전 등을 제거하는데 공을 세워 얼마큼 정치적 기반을 닦았고, 정종 때 서북면의 병마를 다스리는 중책도 맡았었다. 그도 왕위 계승에 대한 야심과 호기(豪氣)는 넘쳤으나, 인격과 공훈, 위세가 아우 방원에 미치질 못해 항상 시기심에 젖어 불만이 많았다.
그때 나타난 사나이 박포(朴苞)가 방간의 팽배한 야심에 불을 질렀다. 박포는 일찍이 무장으로 조선 개국에 공을 세워 개국공신 2등에 책록되었었는데, 1차 「왕자의 난」때도 적극 활약, 지중추원사에 올랐지만, 논공행상 때 정사(定社)2등 공신이 되고, 자기 보다 못한 이무(李茂)가 1등에 책봉된 것에 대하여 불평을 터트렸다가 그만 죽주에 귀양보내지는 괄시를 받았다. 얼마후 풀려난 박포는 기어이 맺힌 응어리를 풀고자 야심에 찬 회안군(懷安君) 방간을 은밀히 찾았던 것이다.
방간은 모처럼 찾아든 박포와 장기판을 벌여 세상살이를 논했다. 박포는 방간에게 가장 옳은 상책으로, 망한 나라 고려조의 자손들처럼 늘 근신할 것이며, 두 번째는 주나라 태왕이 아들 셋 가운데 막내에게 왕권을 전하려하자 위 두형이 산속으로 도망쳐버린 것처럼 해야한다며, 방간의 아픈 곳을 정통으로 찔렀다.
아니나 다를까 방간이 매우 못마땅해하며 또 다른 방책을 물으니, 박포는 “그렇다면 왕권을 도모해야한다. 방원의 군사는 강하고, 회안군(방간)의 군사는 약하니 먼저 선수를 쳐서 쳐부수는 것이 낫다”는 말을 하고 말았다. 이에 방간이 섣불리 자기의 사병(私兵)을 동원, 군사를 일으켜 선죽교에서 사생결단 접전을 벌였던 것이다.
그러나 권력의 쏠림 현상은 어미 쥐를 따르는 들쥐들처럼 확연하였다. 모든 세력은 집권이 확실시되는 방원 편에 서버리고, 방간 편에는 박포와 무장 장사길(張思吉) 뿐이었다했다. 결국 선죽교 접전에서 방간 군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싱겁게 끝난 형제간의 칼부림 결과 패주한 방간은 충청도 홍주 토산(兎山)으로 귀양을 갔고, 박포는 목이 잘렸다. 장사길은 적극적이 아니었다는 점이 인정 되어 왕의 용서를 받았는데, 그는 용맹이 뛰어 나고 병략이 있어 태종때 압록강연안 1000리를 조선 영토로 편입시키는 큰 공을 세우기도했다.
목숨은 부지한 방간은 귀양살이 20여년간 속만 끓이다가, 세종3년(1421) 58세 일기로 유배지에서 죽었다. 방간의 소란은 결국 방원의 집권에 부채질을 한 셈이 되었다. 왕자들이 사병을 거느리지 못하게하는 사병혁파가 단행되고, 하륜의 서두름으로 2월에 세제(世弟)로 책봉된 방원은 그해 11월 13일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태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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