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 73
사람은 자신이 지극히 틀린 상황을 만들고서도 주변의 환경과 사람들을 탓하는 본성이 있다.
특히 눈앞의 욕심에 눈이 뒤집혀 지켜보는 이의 눈길을 깨닫지 못하는 덜된 인간이, 이런 경우를 저지르고 부끄러운 줄 몰라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기도 한다.
조선 성종8년(1477) 사헌부 헌납(獻納) 안침(安琛)이, 아침에 임금이 주재하는 조강(朝講)자리에서 대사간 임사홍(任士洪)의 며느리, 즉 전 임금 예종의 딸인 현숙공주의 집이 법도에 어긋나게 크고 호사스럽다는 논란을 제기했다.
요절한 예종은 성종의 숙부였고, 현숙공주는 성종과 4촌으로, 임사홍의 아들 임광재(任光載)의 아내였다.
관직「사헌부헌납」은 오늘날의 감사원 과장쯤 되는 정5품직으로 대신들이 주도한 조강 자리에 발언권이 센 신분도 아니었다. 안침의 발언은 간사하기로 조야에 소문이 파다한 임사홍을 논란의 중심에 들어 얹어 얼굴 두꺼운 그를 탄핵하려는 의도된 행동이었다.
그때 임사홍이 앉은 「대사간」자리는, 임금을 바른 말로 깨우치고, 백관을 탄핵하는 사간원(司諫院)의 우두머리로 직급이 정3품 고위직이었다.
임금 앞에서 뜬금 없이 하급 신하에게 당한 임사홍은 조강자리가 파한 즉시 사헌부·사간원 양사(兩司) 신료들을 모아 놓고 다그쳤다.
“대간(臺諫)은 마땅히 동료끼리 의견을 종합, 뜻이 일치해야만 위에 아뢰는 법인데, 안침이 혼자서 아뢴 것은 심히 옳지 못하다!”
며 안침을 꾸짖었다. 그러나 수그러 질 안침이 아니었다. 그의 역공은 논리정연하고 매서웠다.
“언관(言官)은 마땅히 가슴속의 일을 모두 말해야한다. 만약 「의견 일치된 말」만하게 되면 반드시 언로(言路)에 막힘이 있을 것이다!”
대꾸가 궁색해진 임사홍이었지만, 임금의 사돈이라는 막강한 위치에서 임금을 구슬리니, 성종이 안침을 불러 다시 한번 생각하게했다.
그러나 뜻을 굽힐 인물이 아닌 안침의 태도에 성종은 달리 방법이 없어, 임사홍과 안침을 함께 직위해제해 버렸다.
임사홍은 성종이 가벼이 다룰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효령대군의 손자사위였고, 자신의 딸 휘숙옹주의 남편 임숭재(任崇載)가, 그의 아들이니, 그는 왕실과 겹사돈이 아닌가.
교언영색(巧言令色)에 야망을 품은 사람은, 항상 달콤한 말속에 흉계를 숨기고 있기 때문에 가장 방어하기가 어렵다. 직위에 앉은 자가 그런 자의 본 모습을 잘못 안다면, 회복하기 힘든 피해를 입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를 좋은 사람으로 착각하게 된다.
성종은 임사홍을「좋은 신하」·「착한 사돈」으로 착각하고 말았던 것이다.
3년이 흐른 성종11년(1480) 왕은 올곧은 신하 안침을 홍문관응교(應敎)에 발탁하고, 임사홍을 왕의 비서실장격인 도승지에 앉히니, 임사홍은 더욱 우쭐 댔다.
그러자 안침은 홍문관 동료들과 합심, 이번에는 임사홍을 직접 겨눠 그의 간사함을 규탄하고 나섰다. 그러나 성종은 임사홍 편을 들어 불같이 화를 내, 안침을 비롯한 홍문관 관원들을 전원 파직시켜 버렸다.
그러자 왕실 종친 이심원(李深源)이 임사홍의 음험하고 간사한 성정을 극력 진술, 안침의 주장을 뒷바침하니 성종은 비로소 깨달아 임사홍을 의주로 귀양 보내 버리고, 홍문관 관원들은 모두 복직시켰다.
이심원은 효령대군의 현손으로 김종직의 제자였다. 그는 종친들만의 과거시험이던 종친과시강경사(宗親科試講經史)에 장원으로 급제, 정의대부(正義大夫)에 제수되어 성종의 총애를 받았다.
그러나 연산군때 갑자사화에 걸려 두 아들과 함께 처형되고 말았다.
이심원의 죽음에는 임사홍의 간악한 입김이 작용했다. 성종이 귀양에서 풀어주긴 했으나 챙기질 않은 임사홍은 딱한 처지에 빠지고 말았다. 그러나 연산군 등극과 함께 다시 본성을 발휘, 쉽게 연산군에게 접근, 폭군의 눈에 들어 연산군을 쉽게 패망의 길로 인도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연산군의 생모 폐출 복수극으로 갑자사화를 주도, 많은 훈신들을 죽이는 가운데, 자신을 폄하했던 이심원을 끌어 넣어 죽음으로 몰았던 것이다.
그런 천하의 간흉 임사홍도 곧고 흠이 없는 안침은 어쩌질 못했다. 안침은 임사홍이 귀양을 사는 동안 다시 등용되어, 성종 말년에 대사성을 거쳐 이조참판으로 부총관을 겸하기도했다. 그는 연산군 등극 초기에 전라도관찰사·한성부우윤·대사헌을 역임하고, 경상도병마절도사·호조참판겸 예문관제학을 거쳐 평안도관찰사로 나갔을때 중종반정을 맞았다.
세상이 바뀌자 임사홍은 처형되고 안침은 특별히 공조판서에 발탁되었다가 이듬해(1515) 그만 병으로 세상을 뜨니, 나이 일흔이었다. 눈앞의 호사만 노린 임사홍의 악명은 갈수록 뚜렷하고, 안침의 청명한 이름은 천추에 빛이 난다.
정연가(한국수필문학가 협회 이사)
'조선 왕조 뒷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왕조 뒷 이야기> 75 (0) | 2018.09.17 |
---|---|
<조선왕조 뒷 이야기> 74 (0) | 2018.09.16 |
<조선왕조 뒷 이야기> 72 (0) | 2018.09.10 |
<조선왕조 뒷 이야기> 71 (0) | 2018.09.09 |
<조선왕조 뒷 이야기> 70 (0) | 2018.09.0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