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 뒷 이야기> 76
중종2년(1507) 10월 16일, 왕은 간성(杆城-강원도 고성)에 귀양 살고있던 아우 견성군(甄城君)을 사약을 보내 죽였다. 왕위에 오른 이태 만의 일이라 자리가 어정쩡한 가운데 아우를 죽여야 했으니 속이 상했다.
견성군이「반역의 중심」이란 누명을 쓴게 분명하다며 버텼으나, 자신을 옹립한 공신들 주장을 꺾는데는 힘의 한계가 있었다.
따지고 보면 견성군도 흠이 있었다.
그는 후궁 홍씨가 낳은 성종의 서6남이다. 연산군 때 그가 자주 들락거리던 절간의 부역을 면해 주고자 종을 시켜 조정 공문서를 위조했다가, 왕실 친인척 행실을 살피는 종부시(宗溥寺)에 끌려가 문초를 받기도했는데, 연산군은 그를 총애한 나머지 벌을 주기는커녕 거꾸로 벼슬을 내려 종부시규찰감으로 삼아 종친들을 살피는 권한까지 주었다.
그는 집을 연산군 홍청들 거처로 삼게 넘겨 주고 유은종이라는 사람 집을 탈취, 항의하는 유은종을 버릇 없다며 벌을 주기도했으니, 그야말로 폭군 연산의 측근으로 행세했다.
연산군 때 왕이 궁궐후원에서 활쏘기를 즐기는 꼴을 보고 문제를 삼았던 성균관 대사성 이과(李顆)라는 인물이 있었다.
이과는 본관이 전의(全義), 열일곱 살 때 문과에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한 수재였다. 그는 29세 때 홍문관부제학에 오르고 곧 성균관대사성이 되어 일찍 정권의 핵심에 든셈이었다. 그가 「왕의 대궐 후원 활쏘기」를 문제 삼은 것은 홍문관부제학 때 일이었는데, 간신들이 이과를 시기한 나머지 그를 찍은 것이었다.
이리하여 이과는 갑자사화 때 전라도로 귀양을 갔다.
이과는 귀양지에서 정신 나간 연산군을 몰아내려 유빈(柳濱)·김준손(金駿孫) 등과 거병하려했다가, 한발 늦어 박원종(朴元宗) 등의 반정으로 연산군이 쫓겨났다는 소식을 듣고 주저 앉고 말았다.
이과는 곧 귀양에서 풀려나와 특별한 임무를 맡았다.
그는 재능을 인정 받아 제술관(製述官)이 되어, 오랫동안 우리나라가 중국과 주고 받은 외교문서에 쓰인 한문의 문체(文體)를 총괄 정리한『이문(吏文)』을 제술했는데, 이는 중국의 속어와 관청 용어의 이해는 물론 우리나라 문자생활의 역사를 밝히고, 중국과의 외교문제에 대한 자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매우 가치가 높은 문헌이었다.
중종2년 이과는 반정공신책록 때 정국원종(靖國原從)공신에 오르고 전산군(全山君)에 봉군되었다.「원종공신」은 정공신(正功臣)인 1·2·3등 외, 이른바 등외 등급 공신으로, 정공신의 친인척, 그리고 불안한 정국의 취약성 보완과 함께 지지세력을 넓게 거느리려는 의도에서 공없는 사람을 챙겨 소외감을 갖지 않게 썼던 하나의 꼼수였다.
한때 재주가 넘쳐 잘 나가던 이과는 반정 때 귀양처에서 역할을 못해, 좋은 자리는 모두 공신들 차지가 되고 자신은 권력 언저리에 맴도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재주있는 자 가볍다」했던가. 이과는 마침내 직위가 뒤쳐짐에 함부로 울분을 토로, 본심을 드러내고 말았다.
이를 가만히 살핀 서얼(庶孼) 출신 노영손(盧永孫)이 이과에게 접근, 그의 불만을 한층 부추기더니, 이과의 「틀어진 심사」를 「절호의 출세 빌미」로 삼아 이과의 목줄을 물고 늘어졌다.
노영손은 「이과가 관작에 대한 불만을 품고 왕이 선릉(宣陵-성종 내외의 무덤)에 나가 친제(親祭)를 올리는 날, 자신과 이찬(李纘)·윤구수(尹龜壽)·김잠(金岑) 등과 작당, 견성군을 추대하고, 반정공신 박원종·유순정(柳順汀) 등을 제거하려했다」고 밀고, 조정을 들쑤셨다.
참으로 그럴 듯한 씨나리오였다.
반정공신들은 아직 제대로 자리 잡히질 않은 권력기반이 흔들릴까 우려, 묻고 따질 것없이 전격적으로 이과를 비롯한 거명된 일당들을 능지처참해 버렸다.
1507년 8월 29일에 갑자기 벌어진 비참한 옥사였다. 날벼락을 맞은 견성군은 간성으로 유배 됐다가 결국 살아 남질 못한 것이다.
이과 등을 역모로 무고하여 죽이고 왕자 견성군 명줄을 끊게했던 노영손은, 일약 팔자가 늘어졌다.
추성보사우세정난(推誠保社佑世靖難)공신 1등에 책록 되고 벼슬은 정2품 가정대부(嘉靖大夫)로 권력핵심에 빨대를 꽂았다.
이로부터 역모를 무고하는 무리들이 빈발, 나라를 어지렵혔다.
노영손의 짓거리를 눈치 챈 사람들은 그를 들개처럼 여겼고, 오만 방자하던 노영손은 결국 공신 녹원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과는 『…나이 17세로 대사간이 되었다가 무함(誣陷)으로 죽었으니, 나이 33세였다』라고 기록 되고, 견성군은 이듬해 무고함이 밝혀져 죄가 풀렸으나 이미 죽은 목숨, 부질 없는 대접이었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 오직 「선택」이 있을 뿐이다. 이과는 불공평한 현실을 인정하고 문제의 실마리를 본인에게서 찾으려 힘써야했다. 「잘못된 선택」이 그의 죽음을 재촉한 것 같았다.
정연가(한국수필문학가 협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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