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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뒷 이야기

두려운 것은「기록」이다 124

by 까망잉크 2019. 2. 9.

 

<조선왕조 뒷 이야기>124 두려운 것은「기록」이다.

(주)하동신문
『어떤 자리에서 어떤 일을 하든 누군가가 보고 있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이 그의 자서전에 남긴 말이다.
들어 둘 명언이다. 한때 시대의 중심에 섰던 이들은 즐겨 회고록을 남긴다.
김구(金九)선생의 <백범일지>, 윤보선(尹潽善) 대통령이 쓴 <외로운 선택의 나날>,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의 <노태우 회고록>, 두권의 회고록을 남긴 김영삼(金泳三) 대통령의 <김영삼대통령 회고록>·<김영삼 회고록>, 김대중 대통령의 <김대중 자서전>. 그런데 대부분 그들 자전적 기록들을 읽은 뒷 맛은 영 깨운하지가 않다.
다른 명사들의 자서전을 통해 불거진「숨긴 사실들」이 많기 때문이고, 떠들썩했던 항간의 소문들은 전혀 언급 없이 치적만 늘어 놨기 때문이다.
목사 강원룡(姜元龍), 정일권(丁一權) 국무총리, 김용식 외무장관, 조선일보 편집자 출신 조갑제(趙甲濟), 선우종원(鮮于宗源) 전 국회사무총장, 12·12사태 주인공 정승화(鄭昇和)장군, 대표적 좌파 지식인 이영회(李泳禧) 교수, 김정렴 청와대 비서실장 등등, 역사의 현장에 몸을 담았던 많은 분들의 여러 기록들을 통해, 최고 권력자들이 감춘 진실들을 곳곳에서 발견 할 수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한때의 권력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객관적 기록을 두려워해야하는 지혜가 반드시 필요하다. 
선조즉위년(1568) 9월 23일, 새 임금 선조는 일찌기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참신한 개혁 정치인 조광조(趙光祖) 등을 죽인 일로 명종때 한번 「삭탈직위」 당한바 있는, 전 영의정 남곤(南袞)의 관작을 재차 추탈(追奪) 할 것을 명했다. 그날 경연 자리에서 임금이 찬성 이황(李滉)에게 물었다.
“근일에 신하들이 모두 남곤이 간사했다고 말하니 무슨 까닭이요?”
이황은 서슴 없이 대답했다.
“기묘(己卯)년에 조광조를 모함, 사림(士林)의 화를 얽어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옆에 국궁했던 승지 김계(金啓)가 「남곤이 귀신이나 물여우 처럼 사림을 일망타진했다」 고 자세히 말하니, 가만히 듣고 있던 이황이 보탰다. “신(臣)은 입이 둔하여 분명히 여쭙지 못했더니, 김계의 말이 모두 옳습니다!”
「물여우」란 물속에 사는 벌레로 사람의 종아리를 쏘면 종기가 돋는 독충이었다.
그런데 너그럽기 짝이 없던 영의정 이준경(李浚慶)은
 「멀리 40년 전의 죄상을 오늘에 논한다는 것은 적절한 처사가 아닌가 합니다!」 하고 남곤을 두둔했다.
그러나 대사헌 김귀영(金貴榮), 대사간 강사상(姜士尙), 부제학 노수신(盧守愼) 등이 40년전 기록을 근거로 남곤의 「간사하고 음특(陰慝)하여 국맥(國脈)을 손상 시킨 죄」 를 들추니, 결국 그의 모든 관작이 추탈 되고 말았다. 기록은 세월이 갈수록 빛이 난다.
남곤은 개국 공신 남재(南在)의 후손, 아버지는 곡산군수 남치신(南致信),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24세 때 문과에 올라 사가독서(賜暇讀書)에 뽑힐 만큼 뛰어난 수재였다.
그런데 그가 승지(承旨)였을때 출세를 서둘러 그만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 무렵 세상은 무오사화의 주역 유자광(柳子光)과 중종반정 주도 인물 박원종(朴元宗)의 기고만장한 행실이 큰 화제로 떠올라 개탄하는 소리가 높았다. 머리 회전이 빠른 남곤은 이를 절호의 기회로 삼아, 신분이 확실한 두사람을 골라 그들이 통분해하는 이야기를 「역적모의」 로 꾸며 밀고했다.
“의원(醫員) 김공저(金公著), 사자원(寫字員-글씨를 써주는 업자) 박경(朴耕) 등이 대신(大臣)을 모해하는 변란을 일으키려했나이다!”
유자광·박원종을 비판했던 김공저와 박경은 턱없이 반역으로 몰려 극형을 받아 죽었고, 남곤은 일약 정3품에서 종2품 가선대부에 올랐다. 김공저와 박경의 불만은 옳았고 더구나 반역은 아니였다.
그들은 추국장에서 당당히 눈을 부라렸다.
“유자광아! 네놈이 어찌 이 자리에 있느냐?” “박원종아! 너는 어째서 옛임금 나인(內人)을 끼고 사느냐?” “강홍(姜洪)·이말(李抹) 그대들은 사관(史官)이니 이 말을 빠뜨리지 말고 기록하여라!”
언관(言官)들도 『남곤의 고변은 공을 세우려 꾸민 것이다』 라고 기록했다.
 이 사건으로 조광조 등의 지탄을 받게 된 남곤은, 결국 교묘한 술책으로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 등을 죽이고 말았다.
학식이 높고 문장이 뛰어나 대제학을 거쳐 영의정까지 올라 호사를 누리던 남곤이 57세로 죽으니, 문경공(文慶公)으로 시호까지 내려졌다. 그러나 하늘의 섭리였을까. 기록에 의해 그의 죄상이 밝혀지니, 1차 「삭탈직위」 10년 뒤에 다시 논의되어 추탈(追奪) 로 모든 관직이 싸그리 지워지는 치욕을 당하고 말았다. 기록은 참으로 무서운 씨앗이었다.
                                                     정  연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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