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선 왕조 뒷 이야기

<조선왕조 뒷 이야기>125

by 까망잉크 2019. 2. 10.


<조선왕조 뒷 이야기>125

 

(주)하동신문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선조26년(1593) 7월 7일, 진주 남강에서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최경회(崔慶會)의 부실(副室) 논개가 사납던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忖六助) 허리를 껴안고 굽이치는 강물에 몸을 던저 순절하였다. 꽃다운 나이 20세. 그러나 여자를 사람으로 보질 않던 그시대 양반들의 편견(偏見)은 그의 거룩한 죽음을 모른척해 버렸다. 
인류 역사상 보기 드문 장한「죽음」이 140여년간 파묻혀 버리니, 진주 땅 서민들 구전(口傳)으로만 전하는 이야기가 별스러웠다. 
「논개가 실존 인물인가?」 「논개가 장수(長水) 사람인가, 진주 사람인가?」 「기생인가? 몰락한 가문의 아녀잔가」 심지어 「혹 일본여자 아닌가」 「기생으로 기록된 까닭이 뭔가?」 등등. 그러나 남아들이 알아 주든 말든 논개의 눈물겨운 죽음은, 왜적의 호남 침범을 늦췄고, 곡창 호남의 군량(軍糧)을 바탕으로 나라의 운명까지 보살피는 결과를 가져온 것은 결코 짐작이 아닌 사실이었다. 
논개는 선조7년(1574) 오늘날의 전라북도 장수에서 아버지 주달문(朱達文)의 딸로 태어났는데 위로 오빠가 하나 있었다. 어머니는 인근 함양의 밀양 박씨, 중국 송나라 주문공(朱文公) 주희(朱熹)를 뿌리로 삼는 신안(新安) 주씨 후예, 논개의 조상으로는 금교찰방을 지낸 7대조 주무현(朱武賢), 승통덕랑(勝通德郞)이라는 낮은 벼슬을 했던 6대조 주용일(朱龍一)이 있는 것으로 봐 근본은 분명한 가문이었다.
논개와 진주땅의 인연은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논개의 아버지는 서당 훈장이던 별 볼일 없는 선비였다가, 논개 14세 때 자식 남매를 두고 그만 세상을 떴다. 논개 남매는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 홀어머니와 사는데 어느날 논개 오빠도 죽고 말았다. 외기러기 신세의 어머니와 무남독녀 논개는 도리 없이 숙부 주달무(朱達武)에게 얹혀 살게 되었다. 
그런 이듬해 논개의 숙부는 조카딸을 현청에 드나들며 풍헌(風憲) 노릇을하던 이웃마을 김씨에게 며느리깜으로 팔았다. 김풍헌의 아들은 정신 장애아. 딸을 잃게 된 논개 어머니는「어림 반푼어치 없다」 며 논개를 끌고 친정곳으로 피해 버렸다. 큰 돈을 주고 산 며느리깜을 떨군 김풍헌은 곧 장수현감 최경회에게 솟장을 냈다. 현감 최경회는 행세깨나하는 김풍헌을 가벼이 여길 수없어, 곧 도망간 논개 모녀를 잡아 드려 재판을 했다. 
두 말하면 잔소리, 따질것 없이 김풍헌 승소, 보호자 주달무가 몸값을 챙겼으니, 논개 모녀가 김풍헌에게 손해를 끼친것 아닌가. 아녀자는 사람이 아니던 현실에서, 논개 어머니의 피를 토하고 싶은 억울함도 말빨이 설 턱이 만무(萬無)했다.
결국 논개어머니에게 「장수현청 노비복역 2년형」 이 떨어졌다. 항소는 꿈도 못꿨다.
그러자 논개가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다. 「소녀가 대신 노비로 살겠습니다!」
논개는 효녀였다. 만약 사내가 그랬다면 가문을 빛낸「대효(大孝)」가 났다며 법석을 떨 일이 아닌가. 현감 최경회는 청을 들어 주어 2년동안 미성년자 논개를 노비로 삼았다. 
착하디 착한 논개는 그 행실로 말미암아 마침내 최경회 부인의 눈에 들었다.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논개가 두해 만에 노역에서 풀려날 무렵 최경회부인이 병으로 죽었다. 
그녀는 숨지기 직전 남편에게, 「논개를 후실로 삼으시오!」 라고 유언했다. 그때가 1590년, 논개 나이 17세, 58세 된 최경회는 세 번째 후실(後室)로 논개를 맞았으나 노비 출신이라 첩이라는 굴레를 벗길 수없었다. 
이리하여 최경회의 부실이 된 논개는 장수에서 살림이나 챙기라는 남편의 명을 거역하고, 경상우병사 직위를 받아 진주성으로 출전하는 최경회를 따라 나섰다. 
선조25년(1592) 10월의 1차 진주성 전투에서 김시민(金時敏) 장군 등의 반격을 받아 패했던 왜적들이, 패전의 한을 풀겠다며 이듬해 6월, 대군 9만3천의 대군으로 다시 진주성을 공격하니, 임란7년전쟁 가운데 최대의 격전이던 이른바 「2차 진주성전투」 가 벌어졌다. 
외곽의 지원을 전혀 받지 못한 진주성은 고립무원(孤立無援) 지경에서 10여일간 버티다가 결국 성은 함락되고 최경회, 김천일(金千鎰) 등 장수들은 남강에 몸을 던져 자결하고 말았다. 선조26년(1593) 6월 29일의 일. 
군사와 백성들 3만 여명을 도륙한 왜적들은 7월 7일, 「위안부」 로 삼고자 진주 고을 기생들을 싹쓸이로 끌어 모아 촉석루에서 「피의 축제」 를 벌이는데, 소문을 들은 논개는 정신을 가다듬어 복수의 칼을 품고 기생 무리에 끼었다.
그녀는 남강 물속에 들어가 수중고혼(水中孤魂)이 된 남편 최경회 장군을 만나보려 했을까? 그러나 빈손으로야 못가지. 촉석루 술자리에서 눈에 띄는 자색으로 왜장 로쿠스케를 유인한 가짜 기생 논개는, 술에 잔뜩 찌들어 달겨드는 적장을 안고 강물에 몸을 날렸다. 
훗날 어느 시인은 그때의 모습을 바람에 휘날린 꽃잎으로 그려 「양귀비 꽃보다 더 붉은 꽃잎」 이라했다.   
정 연 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