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선 왕조 뒷 이야기

<조선왕조 뒷 이야기>126 양사언(楊士彦) 어머니

by 까망잉크 2019. 2. 13.


<조선왕조 뒷 이야기>126 

 

양사언(楊士彦) 어머니


 (주)하동신문   
 시조 「태산가(泰山歌)」 는 한국인이면 누구나 어릴 때 익혀 즐겨 애송했고, 선비들은 청아한 소리로 즐겨 읊는 국민 고시조(古時調)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다분히 만인에게 「노력하면 안될게 없다」 는 만고의 교훈을 주는 불멸의 민족 문학 작품이라 할 수있다.
태산가를 쓴 양사언의 본관은 청주, 아버지는 돈령주부(敦寧主簿) 양희수(楊希洙)로 중종12년(1517)에 태어났다. 위로 이복 형 양사준(楊士俊)이 있었고 어머니를 같이한 아우 양사기(楊士奇)가 있어 3형제가 모두 당대에 문명을 떨쳐, 사람들은 중국 송나라 문장가 소순(蘇洵)·소식(蘇軾)·소철(蘇轍) 3부자에 비견 된다했다. 
또한 3형제가 모두 대과에 올라 벼슬을 했는데 한결 같이 양리(良吏)로 칭송을 받았다. 
맏형 양사준은 명종1년(1546) 문과에 급제, 돈녕부 종4품 첨정(僉正)까지 올랐다. 성품이 인자하고 행실이 발라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양사언도 형과 함께 대과에 올라 함흥·평창·강릉(江陵)·회양·안변·철원 등 8개 고을을 거치며 청백한 수령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시문에 능했고 글씨를 잘 써 안평대군·김구(金絿)·한호(韓濩)와 함께 조선 전기 4대서가로 일컬어졌다. 
셋째 양사기는 명종8년(1553)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좌랑에 오른 뒤 원주·부평 등 7개 고을 수령을 지냈는데 가는 곳 마다 청백한 기풍을 남겼고 문필에 뛰어나 세상에 평판이 드높았다. 
양사언 3형제의 영광은 양사언 생모가 오직 하나 뿐인 자신의 목숨을 바쳐 얻은 희생의 결과였음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자고로 훌륭한 인물은 위대한 어머니의 피맺힌 은공이 뒤에 숨어 있음을 우리는 흔히 발견 할 수있다.
양사언의 생모는 처녀시절 그야말로 우연한 인연으로 양사언의 아버지 양희수의 후실이 되어 양사언·사기 형제를 낳았던 것이다.
양희수가 어느 해 봄날 전라도 영광군수로 발령 받아 가는 길에, 아침 밥때가 되어 때마침 농번기라 소녀 혼자 집을 지키는 한 농가에 들려 소녀로부터 식사대접을 받는데, 음식을 마련해 주는 소녀의 태도가 너무 어른스럽고 품위가 넘쳐 양희수는 감동했다. 
배불리 대접을 받고 집을 나서던 양희수는 고마움의 표시로 소매 속에서 청색과 홍색으로 된 부채 두개를 꺼내 소녀에게 주면서 농담조로 “이는 내가 네게 채단(采緞)으로 주는 것이니 받으라!”했다. 요즘같은면 성희롱으로 걸릴 말이었다.
채단이란 혼인을 앞둔 총각측이 처녀집에 보내는 청·홍색 치마 저고리감 비단이 아니던가. 한데 소녀는 의젓한 풍모의 군수 농(弄)을 농으로 받아 들이질 않았다. 
소녀는 “채단을 어찌 맨손으로 받겠나이까?” 하며 급히 방안으로 들어가 붉은 보자기를 갖고 나와 펴더니 두 자루 부채를 싸서 안방으로 가지고 들어갔다.
몇 년이 흐른 뒤 소녀의 아버지는 「결코 다른데는 시집을 안간다」 고 뻗대는 딸의 하소연을 듣고, 수소문 끝에 양희수 군수를 찾아 벌어진 일을 말하지 않을 수없었다. 
몇해가 흐른 옛일이라 잊고 있었던 양희수군수는, 아침 밥 대접을 잘 받고 부채 두자루 준 대가로 참한 규수까지 얻게 됐으니, 이게 하늘이 내린 축복인가 아니면 운명의 장난인가 헷갈릴 지경이었다.
이미 적자 양사준을 낳은 정부인이 엄연히 버티고 있었던 양희수는, 그때의 문제 소녀를 또 한사람 아내로 맞으니, 그녀는 신분이 무너진 소실(小室)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첩된 몸으로 양사언·사기 형제를 낳으니, 본실 태생 양사준과는 신분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얼마 후 양희수의 정실부인이 죽고 후처가 된 양사언 생모가 3형제를 도맡아 극진히 길렀는데, 양사언·사기 형제는 어머니가 첩실 때 낳은 아이라 허물을 벗지 못했다. 
양사언 생모는 자나 깨나 죄없이 둘러쓴  아들들의 「딱지」 를 벗겨 주는게 결코 지워서는 안될 꿈이었다.
3형제가 철이 들었을 때 아버지 양희수가 숨졌다. 양사언의 생모는 궁리 끝에 극단의 길을 택했다.  그녀는 남편 장례를 치르는 날, 가족들이 함께한 자리에서 맏아들 양사준에게 울면서 매달렸다.
“내가 지금 영감님 성복(成服)과 함께 목숨을 끊고 큰 아드님이 영감님과 같이 복을 입어 준다면, 사람들이 복제를 혼돈, 내가 첩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내 이미 작정한 몸, 무엇을 주저하겠오! 내가 죽은 뒤 사언·사기 형제를 서자로 부르지 않는 다고 언약하면 기꺼이 죽어 영감님 곁에 눕겠오!” 하더니 품속에서 단검을 꺼내 목을 찔러 자결, 처참하게 목숨을 버렸다. 
이리하여 양사언 형제는 허물을 벗을 수 있었고 모두 대과에 올라 순조롭게 벼슬을 했다. 대개 어머니의 마음은 이런 것이었다.  

정 연 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