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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 뒷 이야기

조선왕조 뒷 이야기>127 임진란 최초 의병장

by 까망잉크 2019. 2. 15.

<조선왕조 뒷 이야기>127 

 

임진란 최초 의병장

 (주)하동신문   
선조25년(1592) 4월 14일 반도 남단 부산포에 왜적들이 기어올라 난리가 났다. 
떼거지로 미친 들짐승 같은 왜놈들이 고을에 들이 닥쳐 함부로 사람들을 해치며 분탕질했다. 
세상이 그야 말로 난장판으로 변한 그 때 오늘날의 경상도 의령 시골에서 한가로이 세월을 보내던 곽재우(郭再祐)는 마침내 거병(擧兵)을 결심, 동네 사람들을 모아 놓고 외쳤다.
“왜적이 이미 가까이 다가오니 우리의 부모처자들은 장차 죽거나 왜적의 포로가 될 것이다. 우리 동네에 싸울 수 있는 젊은이가 수백명은 될 것이다. 
마음을 합해 정암나루(鼎岩津)를 지킨 다면 우리 고을은 보전 할 수있을 것이다. 어찌 앉아서 죽기를 기다릴 것인가!”하니, 청년들이 모두 한 뜻으로 일어났다. 그날이 임진란 발발 9일째 되던 날, 곽재우 나이 41세, 이 때 그가 큰 북을 매달아 두들겨 군사를 모았다는 우람한 느티나무 「현고수(懸鼓樹)」 가 오늘날에도 살아 생생하다. 
마침내 5월 4일, 곽재우는 의병을 지휘, 낙동강을 거슬러 내륙으로 쳐들어오는 왜적 수송선을 남강과 낙동강이 합수하는 지점 기강(岐江)에서 격퇴, 승리를 거두니, 이 전투가 왜란 육·해전을 통 털어 거둔 「최초의 승전」 이었다. 
이리하여 왜적은 군량 수송에 차질을 빚게 됐고, 「의령」 이 왜란 최초의「의병 거점」으로 이름났는가 하면, 곽재우는 「의병의 효시(嚆矢)」 로 기록 되었다. 
그러나 함안을 점령한 왜적은 군사를 재정비, 낙동강 뱃길을 기어이 열고자 왜장 야스쿠니가 이끈 군사 2만여명으로 「정암진도강(鼎巖津渡江)작전」 을 감행, 다시 의령을 넘봤다. 
때는 5월 25일 새벽. 그러나 적의 흉계를 미리 간파하고 기다리던 곽재우 의병장은, 백마탄 홍의(紅衣)차림의 신출괴몰(神出鬼沒)한 유격전으로, 뻘속에 허우적대는 개구리 꼴의 왜적을 강궁(强弓)으로 공격, 적의 기세를 꺾었다. 
6월 17일까지 벌어진 20여일간의 전투에서 넋이 빠져버린 왜적은 몇 안되는 패잔병을 추스려 도망쳤다. 
이 무렵 평안도 의주에서 안절부절하던 임금 선조는, 곽재우의 「정암진 대첩」 장계를 받아 보고 이렇게 탄식했다. “…어이하여 관군(官軍)은 이다지도 무력하고 의병은 그렇게도 장하단 말인고…”하더니, 한마디를 덧붙혔다.
“곽재우는 왜적을 숱하게 죽이고도 그 공을 보고하지 아니함이 더욱 기특하다. 과인이 그 이름을 늦게 들은 것이 매우 한스럽다!” 
「정암진 대첩」은 경상우도를 안전하게 지켜낸 전투로 기록됐다.
곽재우는 명종7년(1552)년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서 황해도관찰사 곽월(郭越)의 다섯 아들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그는 태생적으로 돋보이는 바가 있었던지 아버지가 병으로 숨지면서 관복을 벗어 셋째 재우에게 입혀주며 말하기를 「내 업(業)을 이을 자는 반드시 너다!」 했다. 
여덟살 때 한학을 배우기 시작하여 열 여섯 살때 남명 조식(曺植)문하에 들어가 도학을 익히고 조식의 외손자 사위가 되었다.
선조18 년(1585) 서른넷 나이로 문과 2등으로 뽑혔는데, 왕이 그의 답안지「문장이 불손하다」하니 그만 합격이「없었던 일」로 돼 버렸다. 이후 곽재우는 과거 따위는 머릿속에 지워버렸다. 
마흔 한살에 왜란이 발발하자 그는 「관군에게 나라를 맡길 수없다」 싶어 곧 고향 현풍(玄風)으로 달려가, 조상들 영전(靈前)에「의병의 뜻」을 고하고 자신의 기의(起義)가 헛되지 않게 보살펴 주기를 빌었다. 
왜적들이 「조상 유골 훼손」 을 자행할 우려가 있어 선조 묘소의 봉분을 모두 헐어 버렸다. 
의령으로 돌아와 가산을 쏟아 군사를 모우려하자 아내 상산(商山) 김씨가 두손 모아 빌며 말렸다. “어찌하여 그런 소용없는 죽음을 당할 일을 하시려하오!”하며 매달리니, 곽재우는 불같이 화를 내고 칼을 뽑아 아내를 베어버리고자 했다. 
가산을 몽땅 쏟아 장정들을 보살펴 군사력을 돋우니 곽재우 의병 부대는 가는 상승부대로 이름이 났다.    
임진란이 터진 그해 7월, 곽재우는 의병으로 나라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받아 유곡(幽谷)찰방 벼슬을 받은데 이어 형조정랑, 성주·진주목사, 경상좌·우도 병마사, 선산·안동부사 등 고위관직에 발탁 됐고, 광해군때에 들어 한성부우윤, 경상좌·우도병마절도사, 한성부좌윤, 함경도관찰사 등 여러 벼슬을 역임하며 우국애민(憂國愛民)하는 자세로 백성을 보살폈다. 
광해군4년(1612)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됐으나 나가지 않고 말하기를, “지리산 솔잎이 무성하여 부족함이 없으니, 이것으로 생을 마치기를 원합니다!” 했다. 
그는 쌀을 먹지 않는 섭생으로, 시골에서 패랭이를 만들어 팔아 생계를 있다가, 광해군9년(1617) 4월 10일 그가 여생을 보내던 창녕 도천에서 66세 일기로 숨을 거두니, 후세들이 그가 살았던 곳에 그의 호 망우당(忘憂堂)에서 비롯한 망우정을 세웠다. 
경북 달성 태암리에 그의 묘소가있고 후손들은 매년 4월 초하루 제향을 올린다.                                           
정 연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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