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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그림507

또 한여름[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353〉 또 한여름[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353〉 입력 2022-06-25 03:00업데이트 2022-06-25 03:00 소나기 멎자 매미소리 젖은 뜰을 다시 적신다. 비 오다 멎고, 매미소리 그쳤다 다시 일고, 또 한여름 이렇게 지나가는가. 소나기 소리 매미소리에 아직은 성한 귀 기울이며 또 한여름 이렇게 지나보내는가. ―김종길(1926∼2017) “서정시인은 거울을 들여다보고 소설가는 창밖을 내다본다.” 김종길은 한 아름다운 시인을 소개하는 글에 이렇게 적었다. 시인은 자신을 거울삼아 세계를 파악하고, 소설가는 세계를 바라보면서 자아를 찾는다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시인이 거울이 아니라, 창밖을 내다볼 때는 무엇을 볼까. 답은 이 시 속에 있다. 한 노시인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한여름의 .. 2022. 6. 25.
아침 아침 입력 : 2022.06.20 03:00 수정 : 2022.06.20 03:01 김정수 시인 흐르는 물은 쉬지 않는다. 이제 막 바다에 닿는 강을 위해 먹빛 어둠 뒤에서 지구가 해를 밀어 올리고 있다. 너의 앙다문 입술과 너의 발등에서 태어나는 시간과 사랑과 눈물이 가 닿는 세계도 그러할 것이다. 오늘 하루치의 바람 잊지 않으려고 나뭇잎들이 음표를 던진다. 새가 하늘을 찢는다. 새카맣게 젖은 눈빛 꺾이던 골목에도 쿠렁쿠렁, 힘찬 강 열리고 푸른 햇발 일어서는 소리 들린다. 흐르는 물은 반드시 바다에 가 닿는다. 배한봉(1962~) 시인은 시 ‘육탁’에서 “바닥보다 더 깊고 어둔 바닥을 만난 적이 있다”며 “생애에서 제일 센 힘은 바닥을 칠 때 나온다”고 했다. 삶의 바닥까지 내몰린 사람들은 그 바닥을.. 2022. 6. 24.
쉽게 씌어진 시 윤동주 마지막 시…육첩방이 뭐예요 고두현 논설위원 입력 2022.06.17 06:20 수정 2022.06.17 06:20 ​ 쉽게 씌어진 시 ​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볼까, ​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 나는 나에게 .. 2022. 6. 20.
초여름의 정취[이준식의 한시 한 수]〈165〉 초여름의 정취[이준식의 한시 한 수]〈165〉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입력 2022-06-17 03:00업데이트 2022-06-17 03:23 매실은 신맛이 돌아 치아를 무르게 하고, 파초는 창문 비단 휘장에 초록빛을 나눠준다. 긴긴해 낮잠에서 깨어나 무료해진 마음, 버들솜 잡는 아이들을 한가로이 바라본다. (梅子留酸軟齒牙, 芭蕉分綠與窓紗. 日長睡起無情思, 閑看兒童捉柳花.) ―낮잠에서 깨어난 한가로운 초여름(한거초하오수기·閑居初夏午睡起) 양만리(楊萬里·1127∼1206) 여름 초입, 매실에는 아직 신맛이 남아 있고 창가 파초잎 그림자가 비단 휘장 위에서 파르라니 일렁대는 계절이다. 해가 길어지면서 낮잠도 푹 즐길 수 있고 공중엔 버들솜이 분분하게 흩날린다. 자연은 여름으로의 진입을 예고하고, 시인은 버.. 2022. 6. 17.
달[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51〉 달[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51〉 나민애 문학평론가 입력 2022-06-11 03:00업데이트 2022-06-11 03:47 그대 보이지 않는 것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수미산이 가려 있기 때문이리 그대 미소가 보이지 않는 것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잎새에 가려 있기 때문이리 그대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바람 속에 묻혀 있기 때문이리 아 두고 온 얼굴을 찾아 하늘로 솟구치는 몸부림 그대 가슴에 뚫린 빈 항아리에 담고 담는 반복이리. ―최원규(1933∼) ‘해가 좋아, 달이 좋아?’ 만약 시인에게 물어보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 이건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질문에 필적할 만큼 난제다. 어려우니까 다수결에 따라보자. 정확한 수치를 헤아린 사람은 없지만, 우리나라 시에는 유독 달.. 2022. 6. 16.
물처럼 바람처럼 물처럼 바람처럼 / 청송 권규학 하늘은 맑아도 하늘이요 비가 와도 하늘이듯이 좋아도 나빠도 우리네 인생, 바꿀 수도 없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요 불지 않은 바람은 바람이 아니듯이 물은 흐를 때에서야 비로소 물로 살아갈 수 있고 바람은 불 때에서야 바람의 이름을 얻을 수 있나니 물이야 바람이야 탓하지 말고 흐르면 흐르는 대로 따라 흐르고 불면 부는 대로 함께 걸으면 그뿐 비가 올 때의 하늘엔 온통 먹구름일 뿐이지만 비 갠 후엔 티 없이 맑아질 수도 있을지니 화가 나도 슬퍼도 그저 물처럼 바람처럼 살아갈지니. 2022. 6.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