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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그림507

백마고지 白馬高地 백마고지 白馬高地 입력2008-06-11 09:51:00 백마고지 白馬高地 백마고지 白馬高地 -제9사단 제28연대 제6중대장 김운기 대위 백마고지 잔인한 어머니, 그 품속에 말없이 누워 하늘의 별을 세는 땅 위의 별들을 본다. 우람한 원시의 생명과 작은 들꽃의 향기와 새들의 노래 대신, 포탄의 잔해와 화약냄새와 그 밑의 생명이 별이 되어 쉬고 있는, 그 산은 백마고지 다시는 생명을 잉태할 수 없는 다가서고 싶은 그리움도 민통선에 묶이는 산 395고지 백마산, 이름 없는 능선이 세계의 戰史에 떨친다 언제면 별들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산은 산으로 돌아오려나. *지난 100년간 한국어로 쓰인 100편의 명시를 고르라면, 나는 감히 김운기의 ‘백마고지’를 꼽겠다. 소설 ‘흉터와 무늬’를 준비하다 서울 용산의 전쟁.. 2022. 8. 13.
[최영미의 어떤 시] [82] 숲 입력 2022.08.08 01:31 (…숲) 나무 하나가 흔들리면 나무 둘도 흔들린다 나무 둘이 흔들리면 나무 셋도 흔들린다 이렇게 이렇게 나무 하나의 꿈은 나무 둘의 꿈(…) 나무 하나가 고개를 젓는다(…) 나무 둘도 고개를 젓는다(…) 아무도 없이 나무들이 흔들리고 고개를 젓는다 이렇게 이렇게 함께 -강은교(姜恩喬·1946~) ‘이렇게’를 넣은 것이 신의 한 수. 시의 방관자였던 독자들이 ‘이렇게’를 보며 적극적인 행위자로 동참하는 변화가 일어난다. 나무들이 흔들리는 숲에서 나도 따라 흔들리는 것처럼, 내가 나무 넷이 된 것처럼 느끼게 하는 착시. 이것이 시인의 능력이며 리얼리즘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가서 우리 함께 싸우자! 라고 외치지는 않지만 1970년대와 19.. 2022. 8. 10.
[시가 있는 월요일] 지게를 진 형을 보며 [시가 있는 월요일] 지게를 진 형을 보며 입력2022.08.08. 오전 12:07 -이만하면 됐다 내려가자! 중학교만 마치고 지게를 진 셋째 형이 말했다 청미래 넝쿨 사이를 다람쥐처럼 뛰어다니는 나에게 송진 냄새 벌건 톱을 건네주고, 육철낫은 생솔가지 다발에 꽂았다 다리만 보이는 형의 지게를 따라 내려오는 산길은 뒤도 앞도 산이었다 돌보를 건너야 하는 냇가에는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오십이 넘도록 그토록 명징한 말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 -선종구 作 '명징' ​ 겨울날 시인은 '명징(明澄)'이라는 단어에 가장 적합한 순간을 만난다. 말 없는 노동이 끝나고 형이 던진 단호한 한마디는 '명징'의 정수를 보여준다. 사전보다도 깊고 정확하다. ​ 때때로 언어의 정답을 삶 속에서 발견할 때가 있다. 그래서 .. 2022. 8. 9.
팔월은 팔월은/ 장희한 아직은 가을이 이른 여름의 끝자락인데 햇살은 분화구처럼 끓고 있다 매미도 뜨거움에 자지러지고 고추잠자리는 언제 붉어졌는지 꼬리가 익어졌다. 농부들은 한 알의 씨앗이라도 더 거두려고 구슬땀을 흘리고 그에 보답할세라 오곡은 포기마다 작은 아기를 안았다. 저렇게 사랑을 주고 나면 가을은 성큼 다가와 받은 그것만치 내어놓는 사랑의 낱알 들은 들대로 산은 산대로 그릇그릇 가득 담아 놓고 두레상을 차릴 게 다 아직은 가을이 이른 여름의 끝자락인데 햇살은 분화구처럼 끓고 있다 매미도 뜨거움에 자지러지고 고추잠자리는 언제 붉어졌는지 꼬리가 익어졌다. 농부들은 한 알의 씨앗이라도 더 거두려고 구슬땀을 흘리고 그에 보답할세라 오곡은 포기마다 작은 아기를 안았다. 저렇게 사랑을 주고 나면 가을은 성큼 다가와.. 2022. 8. 4.
[최영미의 어떤 시] [81] 수박을 기리는 [최영미의 어떤 시] [81] 수박을 기리는 노래 입력 2022.08.01 00:00 찌는 여름의 나무 (…) 황색 태양, 지쳐 늘어짐 (…) 목은 탄다, 이도 입술도, 혀도: 우리는 마시고 싶다 폭포를, 검푸른 하늘을, 남극을, 그런 뒤 제일 찬 것 하늘을 가로지르는 별들을, 그 둥글고 멋지고, 별 가득한 수박을, 그건 목마른 나무에서 딴 것. 그건 여름의 초록 고래. (…) 물의 보석 상자, 과일 가게의 냉정한 여왕, 심오함의 창고, 땅 위의 달! 너는 순수하다 네 풍부함 속에 흩어져 있는 루비들, 그리고 우리는 너를 깨물고 싶다 -파블로 네루다(Pablo Neruda·1904~1973) (정현종 옮김) (원시와 다르게 행을 배열함) 여름에 갈증을 식히는 데 수박만 한 게 또 있을까. 단골 카페에서 .. 2022. 8. 1.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58〉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58〉 나민애 문학평론가 입력 2022-07-30 03:00업데이트 2022-07-30 03:10 글자크기 설정 레이어 열기 뉴스듣기 프린트 보도블록 틈에 핀 씀바귀꽃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 ―반칠환(1964∼ ) 자라투스트라는 우리에게 엄청나게 많은 아포리즘을 남겼는데 “제때 죽어라”는 것도 그중의 하나이다. 제때 죽는다는 것은 할 일을 다 하고 인생을 완수하는 것을 말한다.. 2022. 7.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