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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그림503

사모곡[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사모곡[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90〉 입력2023.03.18. 오전 3:01 수정2023.03.18. 오전 8:09 어머니는 죽어서 달이 되었다 ​ 바람에게도 가지 않고 ​ 길 밖에도 가지 않고, ​ 어머니는 달이 되어 ​ 나와 함께 긴 밤을 멀리 걸었다. ​ ―감태준(1947∼ ) ​ “당신을 사모합니다.” 이런 고전적인 고백에서의 ‘사모’와 사모곡의 ‘사모’는 서로 다른 단어다. 사모곡(思母曲)은 그냥 사랑 노래가 아니라, 딱 ‘어머니’에게만 한정해서 바치는 노래다. 어머니를 사랑하는 이가 얼마나 많았던지 이제 사모곡은 하나의 유형처럼 여겨진다. 사모곡이라는 제목의 시만 모아도 시집 몇 권은 족히 만들 수 있을 정도다. ​ 맨 처음, 고려가사 ‘사모곡’이 등장했을 때에는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추.. 2023. 3. 20.
봄날의 이별[이준식의 한시 한 수] 봄날의 이별[이준식의 한시 한 수]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입력 2023-03-17 03:00업데이트 2023-03-17 08:37 술잔 앞에 두고 돌아갈 날 알리려는데, 말도 꺼내기 전 고운 임이 목메어 울먹인다. 인생이 원래 정에 약해서 그렇지, 이 응어리가 바람이나 달과는 아무 상관없지. 이별가로 새 노래는 짓지 말게나. 옛 곡 하나로도 애간장이 다 녹아나거늘. 낙양성 모란이나 실컷 즐기세. 그래야 봄바람과도 쉬 헤어질 수 있으리. (尊前擬把歸期說, 未語春容先慘咽. 人生自是有情癡, 此恨不關風與月. 離歌且莫翻新闋, 一曲能教腸寸結. 直須看盡洛城花, 始共春風容易別.) ― ‘옥루춘(玉樓春)’ 구양수(歐陽脩·1007∼1072) 낙양에서의 임기를 마치고 수도 개봉(開封)으로 귀환하는 시인을 위해 열린 전별연.. 2023. 3. 17.
가족사진 찍다 [이 한편의 시조] 가족사진 찍다 /박홍재 부산시조시인협회·국제신문 공동기획 입력2023.03.09. 오전 3:04 ​ 할머니 할아버지 곁에 선 아들딸들 ​ 웃음은 어디 가고 노려보듯 부릅뜬 눈 ​ 웃어요! 소리 질러도 더 굳어진 얼굴들 ​ 눈매가 닮고 닮아 누가 봐도 한식구다 ​ 어린 손자 엉뚱한 짓에 활짝 웃는 그 순간을 ​ 잡았다, 찰칵 소리가 길이 남을 웃음꽃 사진에 찍히면 왠지 영혼을 빼앗긴다고 생각해 표정이 굳어진 시절이 있었다. “웃어요!”라고 몇 번을 말해도 ‘찰칵’하고 셔터를 누르는 찰나 희한하게도 눈은 부릅뜨고 입술은 닫히고 만다. ​ 색 바랜 가족사진을 보면 무뚝뚝한 얼굴들이 마치 붕어빵인듯 줄지어 서 있다. ​ 합계출산율 역대 최하를 기록한 이즈음, 시인은 가족사진을 찍는 순간을 포.. 2023. 3. 10.
늦게 오는 사람 늦게 오는 사람 입력 : 2023.02.13 03:00 수정 : 2023.02.14 10:44 김정수 시인 오 촉짜리 전구 같은 사람을 만나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사랑을 하고 싶다 말없이 마주 앉아 쪽파를 다듬다 허리 펴고 일어나 절여 놓은 배추 뒤집으러 갔다 오는 사랑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순한 사람을 만나 모양도 뿌리도 없이 물드는 사랑을 하고 싶다 어디 있다 이제 왔냐고 손목 잡아끌어 부평초 흐르는 몸 주저앉히는 이별 없는 사랑 어리숙한 사람끼리 어깨 기대어 졸다 깨다 가물가물 밤새 켜도 닳지 않는 사랑을 하고 싶다 내가 누군지도 까먹고 삶과 죽음도 잊고 처음도 끝도 없어 더는 부족함이 없는 사랑 오 촉짜리 전구 같은 사람을 만나 뜨거워서 데일 일 없는 사랑을 하고 싶다 살아온 날들 하도 추워서 .. 2023. 3. 6.
[최영미의 어떤 시][109] 봄은 고양이로다 [최영미의 어떤 시][109] 봄은 고양이로다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3.02.27 00:00업데이트 2023.02.27 00:02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香氣(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生氣(생기)가 뛰놀아라. -이장희(1900~1929) /일러스트=김하경 봄의 향기를 고양이를 통해 생생하게 보여준 시, 1920년대에도 이장희처럼 이미지로만 시를 쓴 시인이 있었다. 이 시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는 ‘호동그란’이다. 호기심 많고 동그란 고양이의 눈이 금방 떠오르지 않나. 100여 년 전 이토록 감각적이.. 2023. 3. 5.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최영미의 어떤 시] [108]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3.02.20 00:00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김영랑(1903~1950) (현대 표준어에 맞춰 수정함) /일러스트=양진경 봄이 저만치 와 있다. 우리말로 쓰인 봄 노래 중에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처럼 보드라운 시가 또 있을까. ‘북에는 소월, 남에는 영랑’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김영랑은 순수한 우리말을 살려 시를 짓는 데 뛰어난 시인이었다. ‘살포시’ ‘보드레한’을 음미하노라면 마음이 밝아진.. 2023. 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