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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그림507

가족사진 찍다 [이 한편의 시조] 가족사진 찍다 /박홍재 부산시조시인협회·국제신문 공동기획 입력2023.03.09. 오전 3:04 ​ 할머니 할아버지 곁에 선 아들딸들 ​ 웃음은 어디 가고 노려보듯 부릅뜬 눈 ​ 웃어요! 소리 질러도 더 굳어진 얼굴들 ​ 눈매가 닮고 닮아 누가 봐도 한식구다 ​ 어린 손자 엉뚱한 짓에 활짝 웃는 그 순간을 ​ 잡았다, 찰칵 소리가 길이 남을 웃음꽃 사진에 찍히면 왠지 영혼을 빼앗긴다고 생각해 표정이 굳어진 시절이 있었다. “웃어요!”라고 몇 번을 말해도 ‘찰칵’하고 셔터를 누르는 찰나 희한하게도 눈은 부릅뜨고 입술은 닫히고 만다. ​ 색 바랜 가족사진을 보면 무뚝뚝한 얼굴들이 마치 붕어빵인듯 줄지어 서 있다. ​ 합계출산율 역대 최하를 기록한 이즈음, 시인은 가족사진을 찍는 순간을 포.. 2023. 3. 10.
늦게 오는 사람 늦게 오는 사람 입력 : 2023.02.13 03:00 수정 : 2023.02.14 10:44 김정수 시인 오 촉짜리 전구 같은 사람을 만나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사랑을 하고 싶다 말없이 마주 앉아 쪽파를 다듬다 허리 펴고 일어나 절여 놓은 배추 뒤집으러 갔다 오는 사랑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순한 사람을 만나 모양도 뿌리도 없이 물드는 사랑을 하고 싶다 어디 있다 이제 왔냐고 손목 잡아끌어 부평초 흐르는 몸 주저앉히는 이별 없는 사랑 어리숙한 사람끼리 어깨 기대어 졸다 깨다 가물가물 밤새 켜도 닳지 않는 사랑을 하고 싶다 내가 누군지도 까먹고 삶과 죽음도 잊고 처음도 끝도 없어 더는 부족함이 없는 사랑 오 촉짜리 전구 같은 사람을 만나 뜨거워서 데일 일 없는 사랑을 하고 싶다 살아온 날들 하도 추워서 .. 2023. 3. 6.
[최영미의 어떤 시][109] 봄은 고양이로다 [최영미의 어떤 시][109] 봄은 고양이로다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3.02.27 00:00업데이트 2023.02.27 00:02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봄의 香氣(향기)가 어리우도다.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 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 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 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 푸른 봄의 生氣(생기)가 뛰놀아라. -이장희(1900~1929) /일러스트=김하경 봄의 향기를 고양이를 통해 생생하게 보여준 시, 1920년대에도 이장희처럼 이미지로만 시를 쓴 시인이 있었다. 이 시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단어는 ‘호동그란’이다. 호기심 많고 동그란 고양이의 눈이 금방 떠오르지 않나. 100여 년 전 이토록 감각적이.. 2023. 3. 5.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최영미의 어떤 시] [108]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3.02.20 00:00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같이 시의 가슴에 살포시 젖는 물결같이 보드레한 에메랄드 얇게 흐르는 실비단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김영랑(1903~1950) (현대 표준어에 맞춰 수정함) /일러스트=양진경 봄이 저만치 와 있다. 우리말로 쓰인 봄 노래 중에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처럼 보드라운 시가 또 있을까. ‘북에는 소월, 남에는 영랑’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김영랑은 순수한 우리말을 살려 시를 짓는 데 뛰어난 시인이었다. ‘살포시’ ‘보드레한’을 음미하노라면 마음이 밝아진.. 2023. 2. 20.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83〉 나민애 문학평론가 입력 2023-01-28 03:00업데이트 2023-01-28 08:07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부엌에서 밥이 잦고 찌개가 끓는 동안 헐렁한 옷을 입고 아이들과 뒹굴며 장난을 치자 나는 벌 서듯 너무 밖으로만 돌았다 어떤 날은 일찍 돌아가는 게 세상에 지는 것 같아서 길에서 어두워지기를 기다렸고 또 어떤 날은 상처를 감추거나 눈물자국을 안 보이려고 온몸에 어둠을 바르고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일찍 돌아가자 골목길 감나무에게 수고한다고 아는 체를 하고 언제나 바쁜 슈퍼집 아저씨에게도 이사 온 사람처럼 인사를 하자 오늘은 일찍 돌아가서 아내가 부엌에서 소금으로 간을 맞추듯 어둠이 세상 골고루 스며들면 불을 있는 대로 켜놓고 숟.. 2023. 2. 19.
동요풍의 한시[이준식의 한시 한 수] 동요풍의 한시[이준식의 한시 한 수]〈200〉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입력 2023-02-17 03:00업데이트 2023-02-17 08:06 반짝반짝 밝디밝은 모습으로, 연못이나 대숲 가에 살지. 어지러이 날 땐 불을 끌고 가는 것 같지만, 한데 다 모여도 연기는 나지 않지. 가랑비 뿌려도 사라지지 않고, 미풍이 불 때면 불타는 듯하지. 옛날엔 책상 위에다, 자주 주머니에 담아 매달아놓았지. (熠熠與娟娟, 池塘竹樹邊. 亂飛如曳火, 咸聚卻無煙. 微雨灑不滅. 輕風吹欲燃. 舊曾書案上, 頻把作囊懸.) ―‘개똥벌레의 노래(영형·詠螢)’ 주요(周繇·841∼912) 당 초엽 낙빈왕(駱賓王)이 쓴 시 중에 ‘거위의 노래’가 있다. ‘꽥, 꽥, 꽥/목 비틀며 하늘 향해 노래하네. 하얀 깃털은 푸른 물 위에 떠오르고/.. 2023. 2.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