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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그림503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83〉 나민애 문학평론가 입력 2023-01-28 03:00업데이트 2023-01-28 08:07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부엌에서 밥이 잦고 찌개가 끓는 동안 헐렁한 옷을 입고 아이들과 뒹굴며 장난을 치자 나는 벌 서듯 너무 밖으로만 돌았다 어떤 날은 일찍 돌아가는 게 세상에 지는 것 같아서 길에서 어두워지기를 기다렸고 또 어떤 날은 상처를 감추거나 눈물자국을 안 보이려고 온몸에 어둠을 바르고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일찍 돌아가자 골목길 감나무에게 수고한다고 아는 체를 하고 언제나 바쁜 슈퍼집 아저씨에게도 이사 온 사람처럼 인사를 하자 오늘은 일찍 돌아가서 아내가 부엌에서 소금으로 간을 맞추듯 어둠이 세상 골고루 스며들면 불을 있는 대로 켜놓고 숟.. 2023. 2. 19.
동요풍의 한시[이준식의 한시 한 수] 동요풍의 한시[이준식의 한시 한 수]〈200〉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입력 2023-02-17 03:00업데이트 2023-02-17 08:06 반짝반짝 밝디밝은 모습으로, 연못이나 대숲 가에 살지. 어지러이 날 땐 불을 끌고 가는 것 같지만, 한데 다 모여도 연기는 나지 않지. 가랑비 뿌려도 사라지지 않고, 미풍이 불 때면 불타는 듯하지. 옛날엔 책상 위에다, 자주 주머니에 담아 매달아놓았지. (熠熠與娟娟, 池塘竹樹邊. 亂飛如曳火, 咸聚卻無煙. 微雨灑不滅. 輕風吹欲燃. 舊曾書案上, 頻把作囊懸.) ―‘개똥벌레의 노래(영형·詠螢)’ 주요(周繇·841∼912) 당 초엽 낙빈왕(駱賓王)이 쓴 시 중에 ‘거위의 노래’가 있다. ‘꽥, 꽥, 꽥/목 비틀며 하늘 향해 노래하네. 하얀 깃털은 푸른 물 위에 떠오르고/.. 2023. 2. 17.
이단(李端)과의 이별 [최영미의 어떤 시] [107] 이단(李端)과의 이별 입력 2023.02.13 00:50 이단(李端)과의 이별 고향 땅 여기저기 시든 풀잎이 뒤덮을 때 친구와의 헤어짐은 더없이 쓸쓸하였네 떠나는 길은 차가운 구름 너머로 이어지고 돌아올 땐 하필 저녁 눈이 흩날렸었지 어려서 부모 잃고 타향을 떠도는 신세 난리 통 겪는 중 우리 알게 됨이 너무 늦었네. 돌아보니 친구는 없고 애써 눈물을 감추니 이 풍진 세상 다시 만날 날은 언제일까 -노윤(盧綸·739~799년) ※류인 옮김, 원시 번역시와 다르게 행을 배치함. /일러스트=양진경 난리 통에 알게 된 친구는 얼마나 애틋할까. 이단과의 이별을 슬퍼하는 노윤의 시에 등장하는 난리는 중국 당나라를 뒤흔든 안녹산(安祿山)과 사사명의 반란(755~763년)을 뜻한다. .. 2023. 2. 13.
고독과 친해지기 [시가 있는 월요일] 고독과 친해지기 허연 기자 입력 2023-02-05 17: 37: 49 수정 2023- 02-06 07: 36: 19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 나를 지켜주는 것은 ​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 그랬지 그랬었지 ​ 대문 밖에서는 ​ 늘 ​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 모진 세월 가고 ​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 박경리 作 중 ​ 박경리 선생은 시도 썼다. 그가 말년에 남긴 시들을 보면 유독 외로움에 대한 성찰이 많다. ​ 선생이 한 시절 혼자 살았던 집에 대한 회고가 가슴에 와닿는다. 특히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는 구절 앞에서는 고개가 숙여진다. .. 2023. 2. 8.
맴돌다 [최영미의 어떤 시] [106] 맴돌다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3.02.06 00:00 피그미 카멜레온은 죽을 때까지 평생 색깔을 바꾸려고 1제곱미터 안을 맴돌고 사하라 사막개미는 죽을 때까지 평생 먹이를 찾으려고 집에서 2백 미터 안을 맴돈다 나는 죽을 때까지 평생 시를 찾으려고 몇 세제곱미터 안을 맴돌아야 하나 -천양희 (1942~ ) /일러스트=양진경 삶의 허무니 어쩌니 길게 말해 무엇하리. “너는 평생 몇 세제곱미터 안을 맴돌았니?”라고 물어보면 게임이 끝난다. 네가 아무리 잘난 척해도, 네 아무리 별볼일 없는 사람이라도 우리는 모두 맴돌다 가는 인생. 직업에 매인 사람이라면, 직장에 구속되지 않은 사람이라도 누구나 공감할 멋진 시. 피그미 카멜레온, 사하라 사막개미 그리고 인간. .. 2023. 2. 7.
입춘(立春)이면 입춘(立春)이면 입력 : 2023.02.06 03:00 수정 : 2023.02.06 03:04 입춘이면 몸을 앓는다 잔설 깔린 산처럼 모로 누워 은미한 떨림을 듣는다 먼 데서 바람이 바뀌어 불고 눈발이 눈물로 녹아내리고 언 겨울 품에서 무언가 나오고 산 것과 죽은 것이 창호지처럼 얇구나 떨어져 자리를 지키는 씨앗처럼 아픈 몸 웅크려 햇빛 쪼이며 오늘은 가만히 숨만 쉬어도 좋았다 언 발로 걸어오는 봄 기척 은미한 발자국 소리 들으며 박노해(1957~ ) 24절기로 치면 한 해의 시작은 입춘이다. 겨울이 물러난 자리에 봄이 들어선다. 환절기에는 몸이 적응하는 데 애를 먹는다. 시인도 예외는 아닌지라 앓아눕는다. 모로 누워 봄의 “은미한 떨림”을 느낀다. 봄이 오는 소리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깊이 와서 알아.. 2023. 2.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