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그림507 허망에 관하여 [최영미의 어떤 시] [103] 허망에 관하여 최영미 시인·이미출판 대표 입력 2023.01.09 00:07 내 마음을 열 열쇠꾸러미를 너에게 준다 어느 방 어느 서랍이나 금고도 원하거든 열거라 그러하고 무엇이나 가져도 된다 (…) 이 세상에선 누군가 주는 이 있고 누군가 받는 이도 있다 받아선 내버리거나 서서히 시들게도 하는 이런 일 허망이라 한다 허망은(…)사람의 식량이다 나는 너를 허망의 짝으로 선택했다 너를 사랑한다 -김남조(1927~) (원시와 다르게 행을 배열함) 최영미의 어떤 시 / 허망에 관하여 에스프레소 커피처럼 진하고 열정적인 시어들. “내 마음을 열 열쇠꾸러미를 너에게 준다”는 첫 행을 읽고 나는 무장해제되었다. 어느 날 그가 왔다. 그에게 내 마음을 다 보여줄 수는 없다. 살아온 날.. 2023. 1. 25. 인생 詩想과 세상 인생 입력 : 2022.12.26 03:00 수정 : 2022.12.26 03:04 김정수 시인 구름을 볼 때마다 달팽이가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느릿느릿 지게를 짊어진 할아버지처럼 밤하늘의 달을 볼 때마다 세간이 줄었다 늘었다 하는 것 같았습니다 흥했다 망했다 살다 간 아버지처럼 그렇습죠 세상에 내 것이 어디 있겠어요 하늘에 세 들어 사는 구름처럼 달처럼 모두 세월에 방을 얻어 전세 살다 가는 것이겠지요 권대웅(1962~) 이 시는 왠지 오르한 웰리 카늑의 시 ‘무료’를 떠올리게 한다. 튀르키예 시인 카늑은 우리는 이 땅에 “무료로 살고 있”다며 하늘과 구름, 시내와 언덕, 비와 흙도 무료라고 했다. 하지만 “치즈와 빵”은 무료가 아니다. 자연은 무료지만 자연에서 얻은 것을 가공한 식량은 공.. 2023. 1. 17. 자유로운 영혼 자유로운 영혼[이준식의 한시 한 수]〈194〉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입력 2023-01-06 03:00업데이트 2023-01-06 03:16 장생불로의 단약(丹藥)도 짓지 않고, 좌선도 하지 않으리. 장사도 하지 않고, 밭갈이 또한 하지 않으리. 한가로울 때 산수화 그려 팔지니, 세상의 때 묻은 돈은 벌지 않으리. (不煉金丹不坐禪, 不爲商賈不耕田. 閑來寫就溪山賣, 不使人間造孼錢.) ―‘포부를 말하다(언지·言志)’ 당인(唐寅·1470∼1523) 도사도 승려도 되기 싫고 상인이나 농부가 될 뜻도 없다. 하고 싶지 않거나 할 수 없는 일에 뛰어들지 않겠다는 거다. 재물 욕심으로 사람 사이에 부대끼며 억지를 부리거나 부정도 서슴지 않는 건 헛짓거리일 뿐이다. 무명의 선비인 시인에게 남은 길은 하나, 과거시험.. 2023. 1. 9. 파랑새는 어디에 파랑새는 어디에 파랑새는 어디에 / 청송 권규학 새해가 시작된 정월의 어느 날 '마테를링크'*의 동화극 '파랑새'*의두 친구 '치르치르와 미치르'*를 찾아 나섰습니다. 혼탁한 이 세상을 구원해 줄파랑새를 찾아달라 부탁하려고... 파랑새를 찾아 떠난 두 친구들 추억의 나라에서는 죽은 혼령을 밤의 궁전에서는 재앙의 실상을 숲 속에서는 자연의 무서움을 알았지만 파랑새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행복을 얻고자 돈을 모으고 행복해지고자 인연을 만들고 세상이란 광산의 행운꽃을 따려고 행복이란 세 잎을 짓밟으면서까지 행운의 네 잎을 찾으려는 사람들 아무리 찾고 또 찾아봐도 행운도 파랑새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행복이란 먼 곳에 있지 않았습니다 재물도 권세도 지식도 풍요도 행복의 지배적인 조건은 아닙니다 '하늘이 푸르다'.. 2023. 1. 8. 길이 끝나면 길이 끝나면 입력2022-12-28 08:00:28 수정 2022.12.28 08:00:28 - 박노해 길이 끝나면 거기 새로운 길이 열린다 한쪽 문이 닫히면 거기 다른 쪽 문이 열린다 겨울이 깊으면 거기 새 봄이 걸어나온다 내가 무너지면 거기 더 큰 내가 일어선다 최선의 끝이 참된 시작이다 정직한 절망이 희망의 시작이다 2022년 한 해가 저물고 있다. 모든 생명을 태우고 태양의 둘레를 달리는 이 행성은 우리를 한 해의 끝에 데려다 놓았다. 올해가 끝난다 해도 공전궤도를 따라 돌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한 해 동안 저마다 성취와 좌절이 있을 것이다. 시인은 혹시라도 길이 끝났다고 좌절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다. 무너지면 더 큰 내가 일어서고, 정직한 절망이.. 2023. 1. 2. 솜틀기 [이 한편의 시조] 솜틀기 /황순희 부산시조시인협회·국제신문 공동기획 입력2022.12.29. 오전 3:04 꾹 눌린 세월이 덜컹대며 돌아간다 시간을 날리면서 낡은 잠을 털어낸다 한 해가 부풀어 오른다 꿈틀대는 기억들 솜틀기는 뭉치고 낡은 솜의 묵은 먼지나 냄새를 없애 결을 다시 살리는 일이다. 꾹 눌린 세월을 솜틀에 넣어 눅눅함을 털어내면 얼마나 개운해지겠는가. 시인의 발상이 신선하고 희망차다. 꾹 눌려도 세월은 돌아간다. 그렇게 3년을 코로나로 눌려 보냈다. 낡은 잠을 털어내듯 지우고 싶은 기억들을 솜틀에 날려 보내자. 눌려서 굳어버린 내 표정도 살포시 입꼬리를 들어 올려 미소를 피워보자. 나를 나답지 못하게 가둔 틀에서 벗어나 진정한 나를 찾아 떠나보자. 묵은 기억 다 털어.. 2022. 12. 30. 이전 1 ··· 3 4 5 6 7 8 9 ··· 8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