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것의 기록들538 박정희와 한강 9 박정희와 한강 9 by성일만Sep 27. 2022 자의반 타의반 치밀한 성품의 김종필은 거사 후 시나리오를 미리 준비해 두고 있었다. 그에 따라 거사 3일 만에 국가재건 최고회의가 구성됐다. 입법, 사법과 행정을 망라한 초법적 권력기구였다. 그런데 내부에서 문제가 생겼다. 쿠데타 공신들끼리 자리다툼이 일어났다. 30명의 최고위원 자리를 놓고 싸움판이 벌어졌다. 마치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권력을 장악한 후의 초기 한나라 조정 같았다. 공신들끼리 서로 치고 박고 난리가 아니었다. 8기생 김형욱은 “왜 우리 자리가 이것뿐이냐”고 거칠게 항의하다 7기생 장경순에게 뺨을 맞았다. 최고위원들은 민정이양 계획을 놓고도 첨예하게 대립했다.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8기생과 박정희의 측근들은 최소 5년가량의 장기 군정을 .. 2022. 11. 16. 도무지라는 말의 어원 ~~ 도무지라는 말의 어원 ~~ ▲ 도모지 형벌 모습 ... ♣ 도무지라는 말의 어원 ♣ 옛날에 시골사는 어떤 한량이 공부는 안하고 주색잡기만 하였는데 나름의 포부는 커서 검판사가 되겠다고 ‘사법시험’에 응시 했어요 시험지를 받아든 한량은 답을 써야 하는데 “도무지” 알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검판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구나’ 하고 느꼈다 하지요 그런데 위에 글에서 “도무지(都無知)”라는 말이 나오지요 이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는 뜻인데 그래서 우리가 '아무리 하여도 방법이 없다'는 뜻으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 때 ‘도무지’라고 하지요 그러나 도무지(都無知)라는 말의 어원은 도모지(塗貌紙)라는 끔찍한 형벌에서 유래했다 하지요 이 도모지(塗貌紙)라는 형벌은 처형당하는 사람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2022. 11. 15. 박정희와 한강 8 박정희와 한강 8 by성일만Sep 26. 2022 한강 다리 위 총격전 반도호텔은 역사적 공간이다. 이 호텔은 1938년 지금의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 자리에서 영업을 시작했다. 1945년 8월 15일 이후에는 미군 고위 장교들의 숙소로 사용됐다. 한때는 미 대사관 건물이기도 했다. 1970년 그 자리에 새 호텔이 들어섰다. 이 호텔 809호실은 장면 총리의 숙소였다. 바로 옆방에는 경호실이 있었다. 당시엔 내각책임제여서 총리는 현재의 대통령과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809호실은 국가 최고 권력자가 머문 곳이었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두 시 809호실 전화가 요란스럽게 울려댔다. 이례적인 호출이었다. 전쟁이 아니면 이 시각 벨이 울릴 리 없었다. 설마 인민군이 다시 남침한 것은 아닐 것이고. 미처 .. 2022. 11. 13. 박정희와 한강 7 박정희와 한강 7 by성일만Sep 26. 2022 D-데이 일이 성사되려면 천시(天時)의 조화가 있어야 한다. 공수부대 병력이 필요한 박정희에게 하늘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평소 호형호제하던 박치옥이 때마침 공수단장으로 부임했다. 박치옥은 스스로 거사를 치르기 위해 공수단장을 자원했다. 박정희가 움직이는 줄은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철저히 입단속을 한 탓이었다. 박정희에겐 절묘한 타이밍에 천시가 작용했다. 당시엔 많은 군인들이 너도나도 쿠데타를 꿈꾸고 있었다. 박치옥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전주에서 연대장으로 있으면서 동기생들과 거사에 관한 의견을 나누어 왔다. 그러나 전주에서 병력을 이끌고 서울까지 올라가긴 무리였다. 군사 거사를 위해선 서울 가까이에서 움직일 병력이 필요했다. 공수단장이 그 일에.. 2022. 11. 8. 박정희와 한강 6 박정희와 한강 6 by성일만Sep 26. 2022 4.19 혁명 박정희는 4년 가까이 진급을 못했다. 이런 경우 대부분 곧 군복을 벗게 된다. 초조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육군참모총장 백선엽이 박정희의 진급 보증을 서 주었다. 한국전쟁의 영웅인 그에 대한 군 내외의 신망은 꽤 높았다. 덕분에 박정희는 소장으로 진급해 6군단 부군단장에 부임했다. 이후 박정희는 부산군수기지사령관으로 옮겼다. 거기서 1960년 4.19 혁명을 맞이했다. 4.19혁명의 도화선은 자유당 정권에 의해 자행된 3.15 부정선거 때문이었다. 그 단초는 1956년 제 3대 대통령선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자유당 이승만과 민주당 신익희 후보가 대결한 이 선거는 야당 후보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싱겁게 끝났다. 그래도 신익희 대신 급하.. 2022. 11. 7. 박정희와 한강 5 박정희와 한강 5 by성일만Sep 25. 2022 육영수 당시 박정희는 법적으로 유부남이었다. 첫 부인 김호남은 여전히 호적에 올라있었다. 두 번째 여인 이현란과는 사실혼 관계였다. 김호남과 사이에는 딸 하나가 있었다. 이현란은 떠났지만 김호남은 여전히 박정희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박정희는 충북 옥천에서 부산으로 피난 내려와 있던 한 여인을 만났다. 박정희와 8살 차이나는 처녀였다. 그녀는 여러모로 박정희와 달랐다. 무엇보다 대지주 집안의 딸로 가난한 농민 부부의 늦둥이였던 박정희와는 언뜻 어울리지 않는 상대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박정희가 싫지 않은 눈치였다. 두 사람은 1950년 12월 12일 대구의 한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한창 남북이 전쟁을 치르던 상황이었다. 사위를 탐탁찮게 여긴 장인은 딸.. 2022. 11. 6. 이전 1 ··· 7 8 9 10 11 12 13 ··· 9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