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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것의 기록들538

[모던 경성]콩나물시루 같은 만원 전차… [모던 경성]콩나물시루 같은 만원 전차…‘교통지옥’경성의 맨 얼굴 입력2022.12.17. 오전 6:01 [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1929년 진명여고보생 120명 탄 전차 전복사고로 충격 남대문 앞을 지나는 전차. 1930년대 중반 나온 사진엽서에 수록됐다. 5전으로 시내 대부분을 다닐 수있는 전차는 근대 교통수단으로 각광받았지만, 콩나물 시루처럼 승객을 가득 태워 비난을 받았다. 전차 사고도 빈발했다. /서울역사박물관 1929년4월22일 아침 진명여고보생들은 개교 기념식을 마치고 전세낸 전차 3대에 나눠탔다. 학교설립자인 순헌귀비(엄비)릉에 참배 겸 꽃놀이를 가기 위해서였다. 효자동에서 출발한 전차는 적선동 서십자각에서 커브를 돌다가 전복됐다. 3대 중 중간에서 달리던 제165호 전차 운전사 석.. 2022. 12. 18.
[김명환의 시간여행] [20] '건전가요' 아닌 노래 트는 택시 단속… 발라드 음반에 '淨化의 노래' 삽입도 [김명환의 시간여행] [20] '건전가요' 아닌 노래 트는 택시 단속… 발라드 음반에 '淨化의 노래' 삽입도 김명환 사료연구실장 입력 2016.05.25 03:00 "모든 버스와 택시에서는 '새마을 노래' 등 건전한 음악만 방송하도록 지도하라." 1974년 8월 5일 교통부가 시·도에 내린 특별 지시다. 교통부는 '대중교통 수단이 퇴폐적 저속가요 등을 요란스럽게 차내에 방송해 손님에게 불쾌감을 주고 있다'며 '암행 단속을 실시해 적발되면 행정처분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경향신문 1974년 8월 5일자). 운전기사가 구슬픈 트로트라도 틀다가 걸리면 혼쭐이 날 판이었다. 제3공화국 시절의 건전가요 '권장'이 얼마나 강력한 것이었는지 실감하게 한다. 이 무렵 서울의 한 경찰서는 유치장에 종일 건전가요를 틀었다.. 2022. 12. 14.
[모던 경성]경성제대 축구팀, 英軍·큐슈제대를 꺾다 [모던 경성]경성제대 축구팀, 英軍·큐슈제대를 꺾다 입력2022.12.10. 오전 6:01 수정2022.12.10. 오후 4:48 [뉴스 라이브러리속의 모던 경성]조선인 학생으로만 구성…철학도 박치우가 왼쪽 공격수, 국어학도 방종현은 실질적 주장, 1930년10월22일 경성운동장에서 열린 영국 해군 브리지워터 팀과의 대결에서 경성제대 축구부는 2대1로 이겼다. 조선인 학생들로 구성된 축구팀이었다. 경기 후 기념촬영에 나선 선수들./'다시 보는 경성제국대학'중 1930년10월 22일 오후 4시 경성운동장(옛 동대문운동장)에서 한·영 축구대결이 펼쳐졌다. 인천항에 입항한 영국 군함 ‘브리지워터’팀과의 친선경기였다. 우리 축구팀은 경성제대(이하 城大·성대) 축구부였다. 전원 조선인 재학생들로 이뤄진 아마추어 .. 2022. 12. 12.
박정희와 한강 15 박정희와 한강 15 by성일만Sep 29. 2022 10.26의 궁정동 김재규와 차지철은 사태 해결 방안을 놓고 충돌했다. 차지철은 강경진압을 주장했다. 탱크로 싹 갈아엎자고 위협했다. 김재규는 보다 신중한 편이었다. 그는 현지에서 상황의 엄중함을 직접 보고 왔다. 박정희는 차지철의 손을 들어주었다. 10월 18일 0시를 기점으로 부산 일대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됐다. 탱크와 장갑차가 시내로 밀고 들어갔다. 그 뒤를 공수부대가 따르고 있었다. 시위는 일시 주춤했지만 부산에 이어 마산으로 퍼져 나갔다. 박정희는 25일 ‘부마사태 대책회의’에서 김재규를 질책했다. 대통령의 추궁을 받은 김재규는 모든 것이 차지철 때문이라고 분개했다. 이미 둘 사이는 돌아오지 못할 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박정희는 이 무렵 중앙정보.. 2022. 12. 5.
[김명환의 시간여행] [19] "反사회적 유흥" 고고춤 전면금지령… 춤추던 대학생 84명 무더기 연행도 [김명환의 시간여행] [19] "反사회적 유흥" 고고춤 전면금지령… 춤추던 대학생 84명 무더기 연행도 김명환 사료연구실장 입력 2016.05.18 03:00 10월유신 단행 5일 전인 1972년 10월 12일 오후, 서울시청에 나이트클럽· 카바레 '사장님'들 60여 명이 불려왔다. 양택식 시장은 "오늘부터 시내 전 유흥업소에서 고고음악 연주와 고고춤 추는 행위를 금한다"고 '지시'했다. 시는 이런 내용의 공한(公翰)도 전 업소에 발송했다. 금지 이유는 '선정적 음악으로 퇴폐적 풍조를 조성케 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국은 업주들에게 '불응하면 영업 정지'라는 으름장도 놓았다. 공권력이 특정한 음악과 춤을 적시해 전면 금지한 것은 사상 유례없는 일이었다.(조선일보 1972년 10월 .. 2022. 12. 2.
박정희와 한강 14 박정희와 한강 14 by 성일만Sep 28. 2022 핵무기 개발 전국이 금세 통일을 맞이할 것처럼 들떠있었다. 언론들도 일제히 거들었다. 그런 와중에 박정희와 그의 옹위 세력은 무대 뒤편에서 은밀히 10월 유신이라는 국면 전환을 꾀하고 있었다. 김종필은 회고록에서 “1971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에게 95만 표라는 아슬아슬한 차이로 당선된 다음 이미 박정희는 보다 강력한 체제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고 돌아보았다. 박정희는 5.16 직후만 해도 몇 차례 민정이양을 발표하는 등 오락가락했다. 하지만 집권 4,5년을 넘기면서 서서히 권력의 맛에 빠져 들었다. 나중에는 한 번 잡은 권력을 영영 놓지 않으려 했다. 10.26을 향한 그의 비극은 그 순간 싹트고 있었다. 김종필이 말한 ‘보다 강력한 체제’란.. 2022. 1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