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그림507 오리 시와 그림 오리만 더 가면 어머니, 찔레꽃처럼 하얗게 서 계실 것이다 기사입력 2022.03.12. 오전 3:02 오리만 더 걸으면 복사꽃 필 것 같은 좁다란 오솔길이 있고, 한 오리만 더 가면 술누룩 박꽃처럼 피던 향이 박힌 성황당나무 등걸이 보인다 그곳에서 다시 오리, 봄이 거기 서 있을 것이다 오리만 가면 반달처럼 다사로운 무덤이 하나 있고 햇살에 겨운 종다리도 두메 위에 앉았고 오리만 가면 오리만 더 가면 어머니, 찔레꽃처럼 하얗게 서 계실 것이다 ― 우대식(1965∼ ) 우리가 ‘아름다울 미(美)’라고 부르는 개념을 고대 그리스인들은 ‘칼론(kalon)’이라고 불렀다. 칼론은 육체의 눈과 정신의 눈으로 감지되는 덕목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이 오래된 아름다움이 그리스인들에게 즐거움, 즉 .. 2022. 3. 14. 행 복 집을 나서는 아들에게 보람찬 하루라고 말했다 창밖은 봄볕이 묽도록 맑고 그 속으로 피어오르는 삼월처럼 흔들리며 가물거리며 멀어지는 젊음에 대고 아니다 아니다 후회했다 매일이 보람차다면 힘겨워 살 수 있나 행복도 무거워질 때 있으니 맹물 마시듯 의미 없는 날도 있어야지 잘 살려고 애쓰지 않는 날도 있어야지 심재휘(1963~ ) “힘내세요!” 전에는 힘들어하는 사람을 보면 위로하며 건네던 말이지만 힘내라는 말보다 힘을 달라는 반응 이후엔 꺼리게 됐다. 때로 한마디 말이 많은 위로가 되지만 절박한, 특히 경제적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이 말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진심을 담은 말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상황이나 마음에 따라 왜곡될 수 있다. 시인은 외출하는 아들에게 무심코 “보람찬 하루”라는 말을 건네곤 후회한다.. 2022. 3. 9. 일출 일출 김정수 시인 입력 : 2022.01.03 03:00 수정 : 2022.01.03 03:01 싱싱한 새벽하늘을 데리고 의사가 분만실로 들어간다 팽팽한 대기 팽팽한 지평선 차디찬 적막이 흐르고 적막이 흐르고 눈 덮인 들판 끝으로 먹물처럼 퍼지는 여인의 외마디 비명 놀란 새가 푸드덕 허공에 희디흰 칼금을 긋는다 하늘의 회음부가 예리하게 절개되고 아기 울음 터진다 사방으로 빛이 터진다 눈 뜨는 돌 눈 뜨는 대지샘물이 걷기 시작한다 함기석(1966~ ) 탄생은 ‘없는 상태’에서 새로 생겨나는 것이지만, 일출은 ‘있는 상태’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해돋이’라 하지만 실상은 태양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 자리에 있는 태양 주위를 도는 지구의 자전에 의한 자연현상이다. 일출은 주객이 전도된 말인 셈.. 2022. 1. 26. 미라보 다리 '모나리자 도난' 사건이 낳은 詩 '미라보 다리' [고두현의 문화살롱] 기사입력 2022.01.08. 오전 12:09 ■ 명작에 얽힌 문화사의 이면 절도범으로 몰린 아폴리네르 절친 화가 피카소와 공범 누명 1주일 구금됐다 풀려났지만 사랑하는 여인과 아픈 이별 함께 걷던 다리에서 추억 잠겨 2년 뒤 붙잡힌 범인은 유리공 고두현 논설위원 기욤 아폴리네르(오른쪽)와 마리 로랑생을 그린 앙리 루소의 '시인에게 영감을 주는 뮤즈'. “아니 ‘모나리자’가 없어졌다고?” 프랑스 파리가 발칵 뒤집혔다. 루브르박물관의 명화 원본이 감쪽같이 사라졌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도난당한 날은 1911년 8월 21일. 월요일인 그날은 박물관 휴관일이었다. 다음날 그림이 없어진 것.. 2022. 1. 9. 새 달력 첫날 새 달력 첫날 [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328〉 기사입력 2022.01.01. 오전 3:01 깨끗하구나 얼려서 소독하는 겨울 산천 너무 크고 추웠던 어릴 적 예배당 같은 세상에 새 달력 첫날 오직 숙연하다 천지간 눈물나는 추위의 겨울 음악 울리느니 얼음물에 몸 담그어 일하는 겨울 나룻배와 수정 화살을 거슬러 오르는 겨울 등반대의 노래이리라 추운 날씨 모든 날에 추운 날씨 한평생에도 꿈꾸며 길가는 사람 나는 되고 지노니 불빛 있는 인가와 그곳에서 만날 친구들을 꿈꾸며 걷는 이 나는 되고 지노니 새 달력 첫날 이것 아니고는 살아내지 못할 사랑과 인내, 먼 소망의 서원을 시린 두 손으로 이 날에 바친다 ―김남조(1927∼) 온라인 게임을 하다 보면 여러 번 죽게 된다. 죽어야 경험치도 쌓이.. 2022. 1. 2. 세월 열차 ♠세월 열차♠ 우리는 지금프랑스의 떼제베 일본의 신칸센 KR 대한민국의 KTX보다 수십배나 더빠른 초특급 고속 세월열차를 타고 인생여행을 하고있다. 이 고속열차는 인생의 봄역을 출발하여 여름, 가을역을 경유하여 종착역인 (은퇴/상속) 인생의 겨울역을 향해 숨가쁘게 달리고 있다. 봄꽃 향기에 취해 청춘이 가는줄 몰랐고 열대야와 밤낮 가리지 않고 고래고래 악을쓰는 매미 울음에 불면의 여름밤을 지새다보니 어느새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꽃잎에 눈길머물 겨를도 없이 낙엽이란 갈색 거울앞에 앉아 노년의 희끗해진 머리에 검은 색칠을 하고 눈가에 늘어난 잔주름을 손가락 다리미로 지우려 애쓴다. 세월열차가 탈선이라도 하여 잠시만이라도 멈추었으면 좋으련만 우리네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무심한 세월열차는 인생의 은퇴역인.. 2021. 12. 25. 이전 1 ··· 21 22 23 24 25 26 27 ··· 8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