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그림507 끝과 시작 [유희경의 시:선(詩:選)]끝과 시작 입력2022.12.28. 오전 11:34 왜 끝이 없는가, 라고 물었을 땐 어디가 시작인가, 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어떻게 앉아 있었느냐, 에 따라 하루의 슬픔이 변했다 어떤 날은 꽃을 들고 있었다 어떤 날은 칼을 들고 있었다 어떤 날은 시간을 들고 있었다’ - 성윤석 ‘9쪽’(시집 ‘그녀는 발표도 하지 않을 글을 계속 쓴다’) 드디어 연말이다. 언젠가부터 이때만 기다렸다. 좋은 일이라곤 하나도 없던, 정말이지 운이 없는 한 해를 떠나보내게 됐다. 어서 털어버리고 새해를 맞이해야지. 아직 며칠 남았는데도, 책상 위에는 새 다이어리가 놓여 있다. 실은 벽에 걸어둔 달력도 내년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잠들어 새해 아침에 깨었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한다. 그.. 2022. 12. 29. 인생 [詩想과 세상] 인생 입력2022.12.26. 오전 3:05 구름을 볼 때마다 달팽이가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느릿느릿 지게를 짊어진 할아버지처럼 밤하늘의 달을 볼 때마다 세간이 줄었다 늘었다 하는 것 같았습니다 흥했다 망했다 살다 간 아버지처럼 그렇습죠 세상에 내 것이 어디 있겠어요 하늘에 세 들어 사는 구름처럼 달처럼 모두 세월에 방을 얻어 전세 살다 가는 것이겠지요 권대웅(1962~) 이 시는 왠지 오르한 웰리 카늑의 시 ‘무료’를 떠올리게 한다. 튀르키예 시인 카늑은 우리는 이 땅에 “무료로 살고 있”다며 하늘과 구름, 시내와 언덕, 비와 흙도 무료라고 했다. 하지만 “치즈와 빵”은 무료가 아니다. 자연은 무료지만 자연에서 얻은 것을 가공한 식량은 공짜가 아니라는 뜻이다. 노동의 대가.. 2022. 12. 27. 설산이 그립다 [세계일보] [박미산의마음을여는시] 설산이 그립다 입력 : 2022-12-12 23:34:00 수정 : 2022-12-12 23:33:59 이순옥 흰눈이 펄펄펄 날리는 날이면 하늘과 맞닿아 납작하게 될 것 같은 히말라야 눈발이 그립다 칼날 같은 얼음 위를 걸어서 넘던 폭풍, 폭풍 속으로 난 길 목숨처럼 질기고 먼 빙하의 뒷길 빙하의 뒷길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짓말 같은 초원이 있다 유목의 핏줄을 먹여 살리는 눈물겨운 초록 벌판 정처 없는 것들이 해마다 목숨 걸고 넘어가는 고갯길 초원 위 짧은 여름의 끝에서 히말라야 설산을 바라보는 눈빛은 또 얼마나 간절한가 저는 우기인 8월에 히말라야를 넘어간 적이 있습니다. 한창 팔팔한 40대였지요. 목숨 걸고 넘어가는 고갯길, 나무에서 떨어진 거머리는 .. 2022. 12. 25. 눈 내린 다음 날 눈 내린 다음 날 입력2022.12.21. 오전 11:40 ‘그 집 주변에는 인간의 낡은 사유가 쌓여 있다 -마치 묘비처럼 핏기 없이 여름은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다 나는 문득 꽃이 핀 줄 알았다 그것은 나이 먹은 한 무리의 눈이었다’ - 사가와 치카 ‘눈의 문’(시집 ‘계절의 모노클’) 주말 출근길. 버스 차창 너머가 온통 하얗다. 겨울이다 새삼. 두툼하게 챙겨 입도록 만드는 세찬 바람에도, 그래 놓고도 덜덜 떨게 되는 영하의 기온에도 실감하지 못한 계절감을 저, 소복하고 새하얀 눈 덕분에 느낀다. 누가 뭐래도 겨울의 왕은 눈이다. 저것이 없다면 얼마나 서운하겠는가. 말은 그럴듯하게 하지만, 눈이 오면 일단 걱정이 먼저다. 길이 막히겠네. 서점 앞이 미끄러워지겠네. 귀찮고 번거롭고 위험해서.. 2022. 12. 23. 조그만 사랑 노래 [최영미의 어떤 시] [100] 조그만 사랑 노래 입력2022.12.19. 오전 12:01 어제를 동여맨 편지를 받았다 늘 그대 뒤를 따르던 길 문득 사라지고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고 여기저기서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돌들이 얼굴을 가리고 박혀 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추위 환한 저녁 하늘에 찬찬히 깨어진 금들이 보인다 성긴 눈 날린다 땅 어디에 내려앉지 못하고 눈 뜨고 떨며 한없이 떠다니는 몇 송이 눈. -황동규(1938~) 일러스트=박상훈 ‘어제를 동여맨 편지’라니 참 멋진 표현이다. 길이 사라지면 ‘길 아닌 것들’도 사라지기 마련이나, 뒤가 반복되며 서로를 부정하는 행이 시적 긴장감을 높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어린 날 우리와 놀아주던 .. 2022. 12. 20. 훈훈한 다짐 훈훈한 다짐[이준식의 한시 한 수]〈191〉 이준식 성균관대 명예교수 입력 2022-12-16 03:00업데이트 2022-12-16 03:25 젊어서도 생계 걱정 안 했거늘, 늙어서 그 누가 술값을 아끼랴. 만 냥 들여 산 술 한 말, 마주 보는 우리 나이 일흔에서 삼년 모자라네. 한가로이 술잔 돌리며 고전을 논하는데, 취해서 듣는 맑은 읊조림이 풍악보다 좋구나. 국화 피고 우리집 술이 익으면, 다시금 그대와 함께 느긋하게 취해 보세. (少時猶不憂生計, 老後誰能惜酒錢. 共把十千沽一斗, 相看七十欠三年. 閑征雅令窮經史, 醉聽淸吟勝管弦. 更待菊黃家온熟, 共君一醉一陶然.) ―‘유우석과 술을 사다 한가로이 마시고 후일을 기약하다 (여몽득고주한음차약후기·與夢得沽酒閑飮且約後期)’ 백거이(白居易·772∼846) 백거이.. 2022. 12. 16. 이전 1 ··· 4 5 6 7 8 9 10 ··· 8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