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그림507 맑은 웃음 맑은 웃음 입력2022-12-07 07:00:28 수정 2022.12.07 07:00:28 - 공광규 캄캄한 밤 시골집 마당 수돗가에 나와 옷을 홀딱 벗고 멱을 감는데 수만 개 눈동자들이 말똥말똥 내려다보고 있다 날이 저물어 우리로 간 송아지와 염소와 노루와 풀잎과 나무에 깃들인 곤충과 새들이 물 끼얹는 소리에 깨어 내려다보는 것이다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온 나를 들판과 나무 위를 깝죽깝죽 옮겨 다니면서 왠 낯선 짐승인가? 궁금해했던 것들이다 나는 저들의 잠을 깨운 것이 미안하기도 하고 삼겹살로 접히는 뱃살이 창피하여 몸에 수건을 감고 얼른 방으로 뛰어가는데 깔깔깔 웃음소리가 방 안까지 따라온다 “얘들아, 꼬리가 앞에 달린 털 뽑힌 돼지 봤지?” .. 2022. 12. 15. 밤 깊은 푸른 기차 [시가 있는 월요일] 밤 깊은 푸른 기차 입력 2022-12-05 16:56:29 여기서부터, -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년이 걸린다 - 서정춘作 '죽편(竹篇) 1' 짧은 시인데 사연 많은 영화 한 편을 본 듯한 이 느낌은 뭘까? 매력적인 시다. 고향을 향해 달려가는 밤기차 차창에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수많은 사연들이 있다. 누구는 눈물을 삼키며, 또 누구는 들뜬 마음으로 밤기차에 올랐을 것이다. 기차는 이런저런 사연들을 싣고 대꽃이 피는 남녘을 향해 달린다. 기차는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달릴 뿐이다. [허연 문화선임기자(시인)] 매경칼럼 2022. 12. 13. 밤눈 [최영미의 어떤 시] [99] 밤눈 입력 2022.12.12 00:00 겨울밤 노천 역에서 전동차를 기다리며 우리는 서로의 집이 되고 싶었다 안으로 들어가 온갖 부끄러움 감출 수 있는 따스한 방이 되고 싶었다 눈이 내려도 바람이 불어도 날이 밝을 때까지 우리는 서로의 바깥이 되고 싶었다 -김광규(1941~) 사랑이란 서로의 바깥이 되는 것. 편안하게 읽히나 깊은 여운을 남기는 시. 복잡한 비유나 상징이 없어도 이렇게나 감동적이고 좋은 시를 만들 수 있다. 겨울 여행을 며칠 앞두고 ‘밤눈’을 읽었다. 겨울밤 노천 역이 얼마나 춥고 을씨년스러운지, 밤늦게 서울역에 내려본 사람은 알리라. 저 멀리 보이는 따스한 방을 찾아 두리번거리며 발을 동동 구르고 전동차에 올라타 기어이 내 방에 도착했을 때, 칼바람을 막.. 2022. 12. 12. 세월이 가면 세월이 가면/ 박인환 세월이 가면 /박인환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과거는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박인환 詩 《세월이 가면》은 1956년에 시인 박인환이 쓴 작품입니다.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술값이 없었는데 시로 대신해 달라는 술집 여주인의 부탁으로 지어진 즉흥시라고 하네요. 1976년 박인환의 추모시진 《목마와 숙녀》에 수록된 시의 원문입니다. .. 2022. 12. 10. 공공도서관 [詩想과 세상] 공공도서관 입력2022.12.05. 오전 3:02 저 숲을 이룬 아파트들 손보다 높이 올라간 서가들 창마다 불이 켜진 무덤들 어차피 다 읽어 볼 수도 없는 색인표 하나씩 둘러쓴 잃어버린 왕조의 유물들 내 살아온 얘기 책으로 쓰면 소설책 열 권도 모자라지 월세 올리러 온 노인이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면 퀴퀴한 침묵이 내리누르는 망자들의 열람실에서 눈에 불을 켜고 무덤을 뒤지는 도굴범들 빌릴 수는 있어도 가질 수는 없는 집들 은행이 말한다 당신은 연체 중입니다 대출 금지입니다 전윤호(1964~) 시인은 ‘서울에서 20년’이란 시에서 아파트를 무덤에 비유했다. 무덤과 무덤이 마주 보고 있어 서로 불편하고, “당신의 눈 속엔 관이 안치”돼 있다고 했다. 하긴 ‘영끌’해 아파트를 샀는데, .. 2022. 12. 8. 합천 해인사 일주문 하나뿐인 길 위에 건너야 할 문 하나 시와 함께 보는 경남의 명소 (57) 합천 해인사 일주문 하나뿐인 길 위에 건너야 할 문 하나 기사입력 : 2022-12-02 08:06:27 파선(破線) 소가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게 인생이라는데 외나무다리는 저기 저렇게 놓여 있는데 타고 갈 소가 없네 한 세상 사는 게 다 공부라는데 그럼 온 세상이 다 책이네 저기 책들은 첩첩 쌓였는데 정작 읽는 사람 없네 건너도 건너도 물은 망망(茫茫) 읽어도 읽어도 세상은 첩첩(疊疊) 누가 길 좀 일러주시게 물어도 대답 없는 산중 세상의 모든 길은 다 하나라는데 저기 저렇게 떡하니 길을 막고 서있는 문 내 어디로 가란 말인가? 또 무엇을 읽으란 말인가? 아! 저기 내가 또 건너야할 강(江) 하나 망망(茫茫). ☞ 본래 일주문이라는 말은 기둥이 .. 2022. 12. 7. 이전 1 ··· 5 6 7 8 9 10 11 ··· 8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