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역사) 이야기674 신의 정원 조선 왕릉37 신의 정원 조선 왕릉37 수렴청정과 세도정치 왕은 허수아비 신세였다 순조와 순정왕후의 인릉(仁陵)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55hansong@naver.com 사진 제공·문화재청, 서헌강, 이창환 입력2011-01-24 11:51:00 홍경래의 난 등 내란을 막은 순조대의 무석인은 장엄하고 근엄한 모습이다. 인릉(仁陵)은 조선 제23대 왕 순조(純祖, 1790~1834, 재위 1800~1834)와 정비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1857) 김씨의 합장릉이다.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자리한 이곳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경기도 광주군에 속했다가 강남 개발과 함께 서울로 편입된 지역이다. 제3대 왕 태종과 원경왕후의 헌릉(獻陵)이 능역 안에 함께 있어 조선 초기와 후기의 능원 양식을 모두 볼 수 있는.. 2022. 9. 1.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6>상주 북천전투 순변사 이일 ‘제승방략’ 완성한 군사전략가… 잇단 패전 탈출 ‘생존왕’ 오명[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입력 :2022-03-20 20:16ㅣ 수정 : 2022-03-21 02:41 상주 북천전투 순변사 이일 집결지 대구 도착 사흘 지체 지휘 공백에 왜군 무혈입성 북방 개활지 전과에 자신감 시야 트인 북천 결전지 삼아 수성전 건의·첩보 묵살 참패 단신으로 빠져나와 목숨 부지 ‘지역 사령관이 지휘권 행사’ 즉각 대응·현장 오판 최소화 ‘제승방략’ 작동했더라면… 1592년 4월 25일 상주 전투는 조선의 중앙군이 개전 이후 처음으로 왜군과 맞섰다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상주 북천에서 벌어진 싸움에서 조선군은 궤멸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전투를 지휘한 순변사 이일(1538~1601)은 거의 단신으로 빠져나가 목숨을 .. 2022. 8. 30. 두문동을 아십니까? 두문동을 아십니까? ‘두문불출(杜門不出)’ 이라는 말이 있다. ‘집 안에 틀어박혀 일체 밖에 나오지 않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말의 유래는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는 과정에 있었던 일화에서 찾을 수 있다. 임신년(1392) 7월 태조 이성계는 공양왕에게서 왕위를 물려받고 도읍을 한양으로 옮겼다. 고려의 신하였던 권문세가들과 고려 왕족 중에서 조선의 태조에게 항복하지 않은 사람들은 개성에 남아 따라가지 않았다. 새 조정인 조선에 반대하여 벼슬살이를 거부한 고려의 유신들이 은거하였던 마을을 그 지역 사람들은 두문동(杜門洞)이라고 했는데, 두문동은 황해북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의 서쪽 골짜기에 있었다. 『개성지』에 의하면 이성계가 정권을 잡은 후 고려의 백성들을 달래기 위해 과거시험을 열고 고려 .. 2022. 8. 30. [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5>정암진 대승 의병장 곽재우 홍의장군의 유격전… 육로로 진로 바꾼 왜군 호남행 막았다[서동철 논설위원의 임진왜란 열전] 입력 :2022-02-27 17:32ㅣ 수정 : 2022-02-28 07:50 정암진 대승 의병장 곽재우 1592년 6월 1일자 선조수정실록은 의령 의병장 곽재우를 이렇게 묘사했다. 망우당 곽재우(1552~1617)의 거병은 4월 22일이다. 왜군 선단이 오늘날의 부산 영도 앞바다로 몰려든 4월 13일부터 헤아려 채 열흘이 되지 않는다. 실록은 곽재우가 ‘흩어져 있는 무사들을 찾아 화복(禍福)으로 달래어 먼저 수십 명을 얻었는데 점점 모인 군사가 1000명에 이르렀다’고 했다. 이렇게 모은 군사로 낙동강과 남강 일대에서 유격전을 펼쳐 왜군의 호남 진출을 막고 의령·삼가·합천을 지켰다. 조경남은 ‘난중잡록’에 망우당.. 2022. 8. 29. 이기환의 Hi-story“이순신은요, 원균은요”… 이기환의 Hi-story “이순신은요, 원균은요”…선비가 쓴 ‘난중일기’가 전한 밑바닥 여론 입력 : 2022.08.28 08:00 수정 : 2022.08.28 08:03 임진왜란을 기록한 공식사료는 당연히 과 이겠죠. 그러나 우리 조상들은 그 어떤 이들보다 기록에 진심인 사람들이죠. 진중일기인 이순신(1545~1598)의 , 관리로서 임진왜란을 치른 류성룡(1542~1607)의 이 대표적이죠. 선조(1569~1608)의 피란길을 수행한 김용(1557~1620)의 , 의병장 김해(1555~1593)와 정경운(1556~?)의 (김해)와 (정경운), 전쟁포로로 일본으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노인(1566~1622)의 등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민간인의 신분에서 전쟁 상황을 기록한 일기가 있습니다. 바로 오희문(.. 2022. 8. 28. 유자광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다 (12)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다 (12) 학사루 현판 사건은 유자광의 가슴 깊은 곳에 오랫동안 남았다 by두류산Aug 19. 2022 12장 유자광은 어려운 일을 겪은 뒤라, 기분도 전환할 겸 아내 박씨와 함께 함양 처갓집으로 길을 떠났다. 김종직은 장인인 박치인을 통해 유자광이 함양에 들린다는 기별을 미리 받았다. 지방의 수령은 조정에서 대신급 관리가 관할 고을에 들리면, 깍듯이 모시고 부모 친지들을 불러 잔치를 베푸는 것이 대개 행하는 일이었다. 김종직은 벼슬이 1품이며 공신인 무령군 유자광이 온다는 소식에 마음이 불편하였다. ‘사사로운 행차이면 아무도 모르게 다녀가면 될 터인데, 미리 관청에 기별까지 하는 것은 무슨 경우인가?’ 김종직은 유자광과 그의 처가 식구를 위한 융숭한 대접을 할 마음이 없었다. ‘.. 2022. 8. 27. 이전 1 ··· 13 14 15 16 17 18 19 ··· 113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