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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역사) 이야기674

신의 정원 조선 왕릉(40)그저 놀 수밖에 없었던 ‘강화도령’ 백성만 삼정 문란에 신음 신의 정원 조선 왕릉40 그저 놀 수밖에 없었던 ‘강화도령’ 백성만 삼정 문란에 신음 철종과 철인왕후의 예릉(睿陵)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55hansong@naver.com 사진 제공·문화재청, 서헌강, 이창환 입력2011-02-28 11:29:00 2011년 776 호 그저 놀 수밖에 없었던 ‘강화도령’ 백성만 삼정 문란에 신음 조선 중기의 석물을 재사용한 예릉의 석물은 거창하고 웅장하다. 예릉은 강화도령으로 잘 알려진 조선 제25대 왕 철종(哲宗, 1831~1863)과 정비 철인왕후(哲仁王后, 1837~1878) 김씨의 능이다. 예릉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38-4 서삼릉지구 희릉(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능)의 오른쪽 언덕에 있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증손자이며 정조의 이복동생 은언군.. 2022. 9. 26.
해바라기와 통일바라기 축제 입력 : 2022.09.25 08:00 수정 : 2022.09.25 08:22 히스토리텔러 기자 지난 주말에 경기 연천 장남면 호로고루 주변에 심어놓은 해바라기를 실컷 보고 돌아왔습니다. 6만송이의 해바라기 밭에서 연신 포즈를 취하고 사진을 찍는 관람객들도 북적댔습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차 한대가 드나들 수 있는 좁은 도로를 겨우 지나가야 했는데요. 이번에 가보니 산뜻한 포장도로가 새롭게 마련된 주차장까지 뚫려있더라구요. 오는 10월4일까지 열리고 있는 행사가 ‘통일바라기 축제’인데요. ‘해만 바라보고 돈다’는 해바라기를 따서 ‘통일바라기’, 즉 통일을 바라는 축제’라 한 겁니다. 참으로 절묘한 작명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나 다른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연천이 북한과의 접경지역.. 2022. 9. 25.
왕의 몸은 역사에게 솔직하다 2 # Trace 6. 왕의 몸은 역사에게 솔직하다 2 불면을 극복한 운동중독, 정종(제 2대왕 1357~1419) b y 정종은 ‘1차 왕자의 난’때 떠밀려 왕위에 올랐지만,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난 후에는 태종 이방원에 자리를 물려준 것처럼, 거의 왕으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버지 태조왕처럼 왕성한 활동을 좋아했던 정종은 왕좌에 오르기 전부터 스스로가 격구를 심하게 하는 이유를 밝히고 있는데요. 정종 1년 9일의 에 보면 “과인이 병이 있어 수족이 저리고 아프니, 때때로 격구를 하여 몸을 움직여서 기운을 통하게 하려고 한다.” 3월 13일에는 “내가 무관(武官)의 집에서 자랐기에 산을 타고 물가에서 자며 말을 달리는 것이 습관이 되었으므로, 오래 들어앉아서 나가지 않으면 반드시 병이 생길 것이.. 2022. 9. 24.
조선 최대의 뇌물사건 (3) 조선 최대의 뇌물사건 (3) 고인 물은 썩게 마련이며, 윗물이 흐리면 아랫물도 흐린 법이다 by두류산Sep 04. 2022 대신들의 탐욕을 역사에 기록하여 심판하였다 대간들은 정승들이 어전에 나아가 임금에게 변명만 늘어놓았다는 소식을 듣고 탄식하였다. 그들은 뇌물을 받은 대신들의 죄가 이대로 덮어지는 것이 안타까웠다. “김주를 잡지 못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김주를 잡고 그가 작성한 장부도 드러났으니, 마땅히 진상을 조사해서 죄를 물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부끄러움을 아는 풍속을 장려할 수 있을 것인가?”세조의 즉위를 도운 훈구대신들이 공신이 되어 조정을 차지한 지가 20년이 지났다. 고인 물은 썩는 법이다. 훈구대신들은 재물을 탐하여 꺼림이 없이 행동하였다. 이미 성종 즉위 .. 2022. 9. 24.
조선 최대의 뇌물사건 (2) 조선 최대의 뇌물사건 (2) 뇌물을 추징하여 대신이 재물을 탐내는 마음을 그치게 하소서 by두류산Sep 02. 2022 뇌물을 받은 자들의 죄질은 뇌물을 준 자와 같습니다 사헌부는 뇌물수수에 연루된 자가 백 명이 넘는 개국 이래 최대의 뇌물 사건을 그냥 덮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사헌부는 연명하여 임금에게 상소를 올렸다. "김주가 권세 있는 고관들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뇌물을 주었는데, 받은 자가 한둘이 아닙니다. 그 이름이 장부에 적히지 않은 자도 많겠지만, 최소한 이름이 장부에 적혀 있는 자는 사면령이 내려 비록 죄를 물을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받은 물건은 몰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임금은 사헌부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성종실록, 재위 7년 11월 22일) 다음날, 사헌부는 또다시 임금에게 아뢰.. 2022. 9. 22.
조선 최대의 뇌물사건(1) 조선 최대의 뇌물사건(1) 성종 7년, 백여 명의 관리가 연루된 조선 최대의 뇌물 사건이 터졌다 by두류산Sep 01. 2022 백 명이 넘는 조정 관리가 뇌물사건에 연루되었다 1476년 성종 7년, 조선 최대의 뇌물 사건이 터졌다. 지방의 수령이 백성들에게 거두어들인 재물로 조정의 대신들과 백 명이 넘는 주요 관리들에게 광범위하게 뇌물을 주어 거의 모든 조정의 신하들이 부정한 재물을 수뢰한 사건이었다. 조선 전기에는 화폐의 유통이 일반적이지 않았다. 그러니 무엇으로 뇌물을 주고받았을까? 이 시대의 뇌물은 보통 귀금속이나 포목, 그리고 지역 특산품인 호피(虎皮), 들깨, 미역, 인삼 등이었다. 벼슬을 얻고자 하거나, 재판의 결과를 뒤집기 위해 토지와 노비를 권세가에 뇌물로 바치는 경우도 있었다. 사헌부는.. 2022. 9. 21.